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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된 '나'는 이전과 같은 존재인가? <캔자스의 유령>

by beato1000 2025. 11. 15.

캔자스의 유령 표지
<캔자스의 유령>

 

 

살해된 피해자가 다시 살아나 범인을 추적하는 SF 소설

최근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SF 작가인 테드 창이 2000년대 초 한국에 내한 강연을 가졌을 때 존 발리의 <캔자스의 유령>을 예시로 SF 작품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캔자스의 유령>이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모른 상태에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테드 창의 강연을 듣고 난 후 정말 궁금했었는데, 존 발리의 단편집이 소개되면서 읽을 기회가 생겼는데, 정말 독특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오래된 명제를 SF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캔자스의 유령(The Phantom of Kansas)>은 존 발리(John Varley)가 발표한 단편으로, 그의 대표작들을 묶은 ‘8세계 시리즈’ 세계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날씨 조작 기술, 신체 복제 기술, 자아의 연속성과 같은 미래적 개념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정체성의 본질을 예리하게 탐구합니다. 특히 ‘살해된 피해자가 다시 살아나 범인을 추적하는’ 구조는 기존 추리 서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긴장감을 형성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문 기상 조작사 로드리게즈(이하 로드)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날씨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고도의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요구하는 직업이며, 로드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눈을 뜬 뒤 알게 됩니다. ‘죽은 뒤 다시 깨어난다’는 것이 일상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백업하고 필요할 때 복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로드 역시 살해되었지만, 이전에 저장해 둔 신체 복제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복원된 신체가 이전 기억의 일부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살해 순간 주변 상황, 누가 자신을 노렸는지, 왜 그녀가 표적이 되었는지 등 결정적인 정보들이 사라져 있습니다. 결국 로드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범인을 찾기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건을 추적합니다. 그녀는 날씨 조작 임무에서 강력한 폭풍을 만들기 위해 수행한 결정들이 누군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충돌했다는 점을 떠올립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로드의 직업적 자부심, 날씨라는 자연 요소를 조작하는 데 필요한 감성적 판단, 그리고 기후 시스템이 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 등을 풍부하게 다룹니다. 발리는 단순히 기술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조작된 자연’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예술적 창조의 의미,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을 모두 서사 속에 결합합니다.
로드가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은 곧 ‘복제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핵심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복제된 몸은 과연 원본과 동일한 존재인가? 기억이 삭제된 채 되살아난 자아는 원래의 자신과 완전히 같은 인간인가? 발리는 이러한 질문을 추상적인 철학 논쟁으로 제시하지 않고, 로드가 실제로 범인과 대면하는 극적 과정 속에서 현실적 갈등으로 구현합니다.
진실을 마주한 순간, 로드는 자신을 살해한 이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때 작품은 ‘과거’라는 것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지, 아니면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인지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캔자스의 유령>은 SF적 설정 속에서 인간의 감정, 죄책감, 그리고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정체성에 관한 가장 섬세한 미래 서사

<캔자스의 유령>은 존 발리가 가진 문학적 특징이 집약된 단편으로, SF가 다룰 수 있는 철학적 깊이와 서사적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정체성에 관한 가장 섬세한 미래 서사 중 하나”라고 평가했으며,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세계관의 완성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크게 칭찬합니다.
가장 주목할 점은 날씨 조작이라는 독창적 소재입니다. 많은 SF가 신체 복제나 기억 저장 기술을 다루지만, 날씨를 예술적 감각으로 다루는 발리의 상상력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로드가 기상 패턴을 ‘조작한다’기보다 ‘연주한다’는 표현에 더 가까운 방식은, 자연을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예술적 공동체의 일부로 확장시킵니다. 이로써 <캔자스의 유령>은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SF’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기후 조작에 따른 정치적 위험성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날씨는 인간의 생태와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이를 통제하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갈등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로드가 살해된 이유가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 아닌 사회적 이해관계와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은, 기술 발전이 가져오는 위험성과 윤리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서사적으로도 이 작품은 단편임에도 뛰어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로드가 자신의 기억 공백을 채워가는 과정은 일종의 미스터리 구조를 따르며, 복제 기술이 일상화된 미래 사회에서 ‘살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새롭게 정의합니다. 이 세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단절일 뿐이며, 정상적 삶이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기억의 단절은 정체성의 균열을 만들어내고, 로드가 이를 회복하려는 과정은 독자에게 심리적 깊이를 제공합니다.
이 작품이 특히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적 미래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의 윤리와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무거운 질문을 자연스럽게 결합했다는 점입니다. 발리는 서사 속에서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 스스로 복제된 자아가 ‘연속된 존재인지’, 혹은 ‘또 다른 인간인지’를 고민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에게 사유의 폭을 넓혀주는 문학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결과적으로 <캔자스의 유령>은 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정확성, 그리고 철학적 성찰이 조화를 이루는 걸작 단편으로 평가됩니다.

 


사이버, 바이오 SF의 방향성을 결정지은 작가, 존 발리 

존 발리(John Varley, 1947~ )는 미국의 SF 작가로, 1970년대 이후 신세대 사이버·바이오 SF의 방향성을 결정지은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그는 아서 C. 클라크, 하인라인, 딕과는 다른 결을 가진 작가로, 기술 발전이 인간 신체와 사회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정교하게 탐구한 인물입니다.
발리는 ‘8세계(Eight Worlds)’ 시리즈로 유명하며, 이 세계관은 인류가 외계 존재에게 지구를 빼앗기고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서 새로운 문명을 구축하는 미래를 다룹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자유로운 성적 정체성, 신체 교체 기술, 클론과 복제 인간, 기억 백업, 생물학적 변형 등 현대적·미래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뤘다는 점입니다.
그는 ‘신체와 자아’라는 주제를 문학적 실험 수준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몸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교체 가능한 껍데기이며, 기억은 디지털처럼 저장·수정 가능한 정보로 다뤄집니다. 발리의 작품은 이러한 미래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윤리적, 정체성적 파장을 중심에 두며, 단순한 기술 묘사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질문을 깊이 탐구합니다.
또한 발리의 문체는 감수성이 풍부하면서도 과학적 정확성을 갖추고 있어, 하드 SF와 소프트 SF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듭니다. 그는 전통적 영웅 서사 대신, 개인의 심리적 변화와 사회 구조의 미묘한 균열을 섬세하게 다루며 ‘휴머니즘적 SF’라는 새로운 지점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고전 SF의 흐름을 잇는 동시에, 미래사회에서 신체·기억·정체성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비판적으로 탐색한 작가로서, 현대 SF의 철학적 기반을 확장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캔자스의 유령>은 그가 가진 감각적 상상력과 철학적 깊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존 발리의 <캔자스의 유령>은 기술 발전과 인간 정체성이 충돌하는 순간을 정교하게 그려낸 단편입니다. 날씨 조작이라는 독특한 소재, 복제 기술이 만든 사회적 구조, 기억 단절을 경험한 인간의 감정 등을 하나의 서사로 응축해, 단편임에도 압도적인 밀도를 자랑합니다. 이 작품은 미래 기술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윤리적 긴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독자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뛰어난 SF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