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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감정이 균형을 이룬 완벽한 정치 SF, <빼앗긴 자들>

by beato1000 2025. 10. 16.

빼앗긴 자들 표지
<빼앗긴 자들>

 

 

 

서로 다른 체제를 통해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SF적 상상력으로 푼 소설

SF 소설은 어떤 주제를 다룰 수 있을까요? 저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SF 소설을 좋아하지만, 정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품고 있는 작품을 특히 좋아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인류가 혁명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이상사회를 SF 장르의 상상력으로 탐구해본 소설입니다.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소설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은 그녀의 대표적인 “헤인 우주 연작” 가운데 한 작품으로, 인류 문명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체제를 통해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탐구한 철학적 SF입니다. 1974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단순한 공상과학소설을 넘어, 사회학과 정치철학, 인문학적 성찰이 결합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두 개의 자매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입니다. 우라스는 풍요롭고 물질적 자원이 넘치는 행성으로, 자본주의적 질서와 국가 체제가 존재합니다. 반면 아나레스는 혁명가 오도(ODO)의 사상에 따라 건설된 무정부주의 사회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운영됩니다. 주인공 셰벡은 아나레스 출신의 물리학자로, ‘시간 동시성 이론’이라는 혁신적 연구를 통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열고자 합니다.
셰벡은 아나레스에서 태어나 이상주의적 공동체 속에서 자랐지만, 점차 그 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됩니다. 아나레스는 명목상 자유로운 사회이지만, 실상은 사회적 압력과 집단적 동일성에 의해 개인의 창의성이 억압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우라스로 초청을 받아, 그곳의 학문적 풍요와 개인적 자유를 경험하지만, 그곳에서도 탐욕과 경쟁, 불평등에 실망하게 됩니다.
이 두 행성의 대비는 단순한 사회 체제의 비교를 넘어,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셰벡은 두 세계 어디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자신이 속한 우주 전체가 하나의 ‘빼앗긴 세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목 <빼앗긴 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물질을 빼앗긴 자들만이 아니라, 이상과 관계, 의미를 잃어버린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소설의 서사는 시간적으로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현재와 과거, 두 행성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면서, 셰벡의 사유와 성장, 그리고 철학적 각성이 점층적으로 드러납니다. 르 귄은 이를 통해 사회 구조가 인간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섬세하게 탐구합니다. 그녀의 문장은 시적이면서도 명료하며, 과학적 개념과 인간적 감정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결국 <빼앗긴 자들>은 한 과학자의 여정을 통해 ‘소유하지 않음’의 철학, 그리고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서사입니다. 르 귄은 인간 사회의 본질을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 올려놓으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이상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사회적 감수성과 인간주의적 시선의 결정체인 작품

<빼앗긴 자들>은 어슐러 르 귄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사회철학적 SF로 평가받습니다. 발표 당시 이 소설은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주요 SF 문학상을 모두 수상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습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SF라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인간 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문학적 성취로 인정받았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소설을 “사상과 감정이 균형을 이룬 완벽한 정치 소설”이라 부릅니다. 르 귄은 단순히 두 체제를 대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인과 공존하며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가는지를 탐구합니다. 우라스의 자본주의는 풍요 속의 불평등을, 아나레스의 무정부주의는 평등 속의 억압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이 대조를 통해 어떤 사회 체제도 완벽할 수 없으며, 진정한 자유는 제도나 이념이 아니라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또한 여성 작가로서 르 귄이 보여준 사회적 감수성과 인간주의적 시선의 결정체입니다. 그녀는 남성 중심적 SF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적 관계와 공존의 가치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셰벡의 과학적 여정은 곧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정신적 탐구로 읽힙니다. 이는 그녀의 또 다른 명작 <어둠의 왼손>과 함께, 르 귄이 구축한 ‘윤리적 SF’의 핵심적 성취입니다.
문체와 구조 면에서도 <빼앗긴 자들>은 독보적입니다. 시간의 순환 구조, 철학적 대화, 상징적 이미지들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하나의 완벽한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특히 “시간은 소유될 수 없다. 시간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르 귄의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 사회에 유효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공동체의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는가? 르 귄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다시 성찰하게 합니다.
결국 <빼앗긴 자들>은 단순한 미래 소설이 아니라,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녀는 ‘이상향’이란 도달 가능한 목적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과정임을 일깨웁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20세기 SF의 정점이자, 21세기 인문학적 성찰의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SF 판타지 작가, 어슐러 K. 르 귄

어슐러 K.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 1929~2018)은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가장 영향력 있는 SF·판타지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미래를 상상하는 작가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조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 철학적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르 귄의 작품은 과학적 설정을 통해 현실의 문제—성별, 권력, 자유, 평등—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르 귄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인류학자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가정환경은 그녀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와 신화를 접하며, 인간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류학적 통찰은 훗날 그녀의 모든 작품에 녹아들었습니다.
그녀의 문학 세계는 ‘헤인 우주(Hainish Cycle)’라는 설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는 수많은 행성과 문명이 상호작용하는 거대한 연작으로,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 <세계의 이름은 숲> 등이 모두 이 세계관 안에 속합니다. 각 행성은 다른 사회 체제와 철학적 가치관을 상징하며, 르 귄은 이를 통해 인간 문명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했습니다.
르 귄은 또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SF 장르를 새롭게 정의한 작가입니다. 그녀는 기존 남성 중심의 공상과학소설에 도전하며, ‘타자와의 공존’과 ‘다양성의 윤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어둠의 왼손>에서는 성별이 없는 인류를 설정해 젠더의 본질을 질문했고, <빼앗긴 자들>에서는 소유 개념 자체를 해체하며 자유의 의미를 재정의했습니다.
그녀의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입니다. 복잡한 사상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르 귄은 “SF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바로 그 신념을 증명하듯, 언제나 현실 세계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생애 동안 르 귄은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장르 작가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철학자, 시인, 인류학자의 시선을 가진 작가로서, 문학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확장했습니다.
르 귄은 2018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문학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은 그녀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고 사색적인 걸작으로,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자유”라는 역설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앞으로도 인류가 스스로의 세계를 성찰할 때마다 반드시 떠올릴 하나의 ‘등불’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