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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학사의 전환점이 된 작품, <캔터베리 이야기>

by beato1000 2025. 10. 30.

캔터베리 이야기 표지
<캔터베리 이야기>

 

 

14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순례'라는 여정 속 인간의 욕망, 위선을 다룬 작품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는 중세 영국 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구조를 통해 인간 사회의 축소판을 그려냅니다. 14세기 후반의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순례’라는 하나의 여정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인물들이 각자의 삶과 욕망, 도덕과 위선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단순하지만 매우 강력합니다. 런던 근교의 사우스워크에 있는 ‘탭 여관(Tabard Inn)’에 모인 순례자들이 성 토머스 베켓의 무덤이 있는 캔터베리로 가는 길에 각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여관 주인 해리 베일리가 제안한 것은, 여정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 “왕복으로 각자 네 개의 이야기를 하자”는 규칙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총 120편의 이야기가 계획되었지만, 초서는 완성하지 못한 채 24편만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24편만으로도 중세 영국 사회의 계층적, 도덕적, 문화적 면모를 압도적인 생동감으로 보여줍니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직자, 기사, 상인, 법률가, 농부, 밀러, 의사, 아내 등 다양한 계층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삶의 배경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를 들어 <기사의 이야기>는 고귀한 사랑과 명예를 다루며, 기사 계층의 이상을 드러냅니다. 반면 <밀러의 이야기>는 거칠고 외설적이며, 인간의 본능과 속물성을 풍자합니다. <바스의 아내 이야기>는 여성의 욕망과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며,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독해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탁월함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단순히 병렬적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각 화자의 신분과 성격이 이야기의 형식과 내용에 직접 반영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이야기 그 자체가 화자를 드러내는 ‘자기표현’의 장이 됩니다. 초서는 이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목소리가 서로 부딪히고, 때로는 조롱하며, 때로는 공감하는 ‘서사적 다성(多聲) 구조’를 완성합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인간의 욕망과 위선, 그리고 진실에 대한 모순된 태도입니다. 성직자들은 경건함을 내세우지만 돈과 권력에 집착하고, 평민들은 투박하지만 진실하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초서는 도덕적 설교보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세계에서는 선과 악, 고결함과 저속함이 혼재하며, 바로 그 복잡성이 인간의 본질임을 드러냅니다.
문체적으로도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영어(Middle English)의 완성형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초서는 당시 일상 언어였던 영어를 문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으며, 리듬감 있는 운문체와 서사적 유머를 결합해 새로운 문학 양식을 창조했습니다.
결국 <캔터베리 이야기>는 단순히 순례의 기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인간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거짓말하며, 웃고, 싸우는지를 생생하게 담은 인간 코미디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초서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욕망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의 다면성을 유쾌하고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민중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문학 속에 담긴 기념비적인 소설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어 문학의 시작이자, 서양 문학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중세까지의 문학이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쓰인 데 비해, 초서는 영어를 통해 대중적인 이야기 문학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고상한 귀족 문학과 서민적 유머를 결합시켜, ‘영국적인 문학 전통’의 뿌리를 만들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민중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문학 속에 담긴 책’이라고 평가합니다. 기사나 성직자뿐 아니라 하층민과 여성, 심지어 부정직한 인물들까지도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히 내세웁니다. 초서는 이들의 목소리를 검열하지 않고, 각각의 세계관을 동등하게 존중합니다. 이 점에서 그는 현대적 의미의 ‘다성적 서사’를 미리 구현한 작가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사회에 대한 풍자이자,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부패했고, 사회는 계급으로 철저히 나뉘어 있었지만, 초서는 특정 계급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는 웃음과 풍자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약점을 드러냅니다. 이런 접근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닌, 인간 이해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문학적으로도 <캔터베리 이야기>는 놀라운 다양성을 자랑합니다. 각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장르와 어조가 모두 다릅니다. 기사 이야기에서는 낭만적인 궁정 사랑이, 밀러 이야기에서는 음탕한 희극이, 수도사 이야기에서는 도덕적 우화가 펼쳐집니다. 초서는 한 작품 안에서 비극과 희극, 로맨스와 풍자를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이로써 독자는 중세 사회 전체의 정신적 풍경을 하나의 서사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초서의 언어적 감각은 탁월합니다. 그는 운문을 리듬감 있게 사용하면서도, 일상적인 대화의 리듬을 그대로 살립니다. 특히 캐릭터 묘사에서는 단 몇 줄로 인물의 계급, 가치관, 유머 감각까지 표현해냅니다. 예를 들어 “밀러는 얼굴이 불그스레하고, 주먹은 맷돌만 하며, 코끝엔 사마귀가 있었다”는 묘사만으로 거친 서민의 생동감이 살아납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캔터베리 이야기>는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모순이 시대를 초월해 반복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기술 문명과 사회 제도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무엇보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찬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찾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세상을 바라봅니다. 초서가 순례자들을 통해 보여준 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오늘날의 소설, 영화, 드라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서양 이야기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기에 충분한 작가입니다.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가, 제프리 초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는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시인이자 외교관, 철저한 관찰자입니다. 그는 영국 문학이 프랑스어나 라틴어 중심에서 벗어나, 자국어인 영어로 독자적 문학 전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초서는 런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부터 왕실의 행정관과 외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외교 업무를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 같은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캔터베리 이야기>의 구성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초서의 문학적 경력은 정부 관료로 일하면서 병행된 것이 특징입니다. 초기 작품인 <공작 부인에게 바치는 책(Book of the Duchess)>은 서정시적 비가(悲歌)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립했습니다. 이후 <새의 의회(The Parliament of Fowls)>,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Troilus and Criseyde)> 등을 통해 사랑과 운명, 사회 풍자를 결합한 문체를 발전시켰습니다.
초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 중세 영어를 문학의 중심 언어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당시 지식인과 귀족들은 여전히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했지만, 초서는 영어로 인간의 다양한 삶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문체는 단순한 구어가 아니라, 음악성과 운율이 살아 있는 예술적 언어였습니다.
초서의 글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찰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는 성직자의 위선, 귀족의 허영, 평민의 유머를 모두 포착하면서도, 그 누구도 완전히 악하거나 선하지 않게 그렸습니다. 이는 인간의 복합성을 이해하고자 한 초서의 포용적 시선 덕분입니다.
초서는 또한 초기의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당시의 문학이 신화나 전설에 의존하던 것과 달리, 초서는 실제 삶과 사회를 그대로 문학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그는 인간을 도덕적 교화의 대상이 아닌,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습니다.
제프리 초서는 1400년 런던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무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코너(Poets’ Corner)’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는 훗날 셰익스피어, 밀턴, 디킨스 등이 이어받는 영국 문학 전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초서는 단순한 고전 작가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를 문학으로 옮긴 최초의 근대적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그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인간의 다양성과 언어의 힘, 그리고 이야기의 영원한 가치를 증명하는 불멸의 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