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단 한 번의 점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들—발레리나는 예술과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존재입니다. 고전 발레부터 현대 발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발레리나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무대를 배경으로 발레의 기술, 감성, 철학을 새롭게 정의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발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세 명의 발레리나—안나 파블로바, 마고트 폰테인, 미스티 코플랜드—의 삶과 대표작, 그리고 그들이 예술계에 끼친 영향까지 폭넓게 조명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탄을 전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안나 파블로바 (Anna Pavlova) – 무대를 넘어 세계로
안나 파블로바는 18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10세의 나이에 제국 발레학교(오늘날 바가노바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녀는 남다른 끈기와 열정으로 동기생들 사이에서 실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발레리나가 체격적으로도 풍성하고 균형 잡힌 형태를 추구하던 시절이었지만, 파블로바는 마른 체형과 긴 팔, 길게 뻗은 다리로 오히려 ‘요정적인’ 무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졸업 후 마린스키 극장 발레단에 입단한 그녀는 ‘지젤’, ‘라 실피드’, ‘라 바야데르’ 등에서 주역을 맡으며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특히 그녀의 발끝을 활용한 섬세한 포인트워크는 이후 수많은 발레리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작품으로는 죽어가는 백조 (The Dying Swan)가 있습니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의 음악에 맞춘 2분 남짓한 솔로 작품. 파블로바의 부드럽고 감정 어린 동작이 백조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냅니다. 다음으로 지젤이 있습니다. 순수와 비극의 감정선을 오롯이 전달하며, 그녀의 감성 표현력이 정점에 도달한 작품입니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라 실피드, 코펠리아, 라 바야데르 등 고전 낭만 발레에서 그녀만의 해석으로 새로운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파블로바는 ‘발레의 대중화’라는 사명을 가지고 세계 5 대륙을 순회하며 4천 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녀는 왕실 극장을 벗어나 작은 도시, 심지어 농촌까지 공연장을 넓히며 “발레는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철학을 실현했습니다.
특히 아시아, 호주, 아프리카 등 유럽 외 지역에서 발레의 첫인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세운 ‘파블로바 발레단’은 이후 수많은 국제 발레단의 모델이 되었으며, 여성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 확대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무대를 준비하며, “나의 마지막 의상은 발레 의상이길”이라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고트 폰테인 (Margot Fonteyn) – 영국 발레의 정점
1919년 영국 리긴 시티에서 태어난 마고트 폰테인은, 영국이 발레 불모지였던 시절에 고전 발레의 정수를 구현한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권유로 무용을 시작한 그녀는, 런던 사들러스 웰스 발레학교(현재의 로열 발레 스쿨)에서 정통 클래식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1934년 15세의 나이에 로열 발레단에 입단하여, 1940년대 중반부터 주역을 맡기 시작했고, 이후 40년 넘게 무대를 지켰습니다.
그녀는 프레데릭 애쉬튼, 케네스 맥밀런과 같은 유명 안무가들과 협업하며 수많은 오리지널 작품을 초연했고, 고전뿐 아니라 현대 발레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췄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1961년, 루돌프 누레예프가 소련에서 망명한 직후, 당시 42세였던 그녀가 24세의 누레예프와 파트너로 무대에 올랐을 때였습니다. 나이 차이와 스타일 차이를 극복하고 만들어낸 그들의 호흡은 전설로 남습니다.
대표작품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습니다. 누레예프와의 파드되는 지금도 ‘사랑의 절정’이라 회자됩니다.마농, 마이어링: 케네스 맥밀런의 심리극을 완벽하게 해석하며, 고전에서 현대 심리 발레로의 전환을 보여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젤, 코펠리아, 백조의 호수 등 고전 레퍼토리도 완벽하게 소화한 무용수입니다.
폰테인은 예술적 품위와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특히 발레리나로서 50세까지 주역으로 무대에 선 것은 지금도 이례적이며, 은퇴 후에도 후배 발레리나 양성과 문화활동에 힘썼습니다.
그녀는 단지 테크닉이 아닌 무대 위 '존재감' 자체가 예술이라는 개념을 확립했으며, 영국 발레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도록 이끈 결정적 인물입니다.
1979년, 영국 여왕에게서 ‘데임(Dame)’ 작위를 받으며 예술계의 국보급 인물로 추앙받았습니다.
미스티 코플랜드 (Misty Copeland) – 편견을 깬 발레의 현재와 미래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미스티 코플랜드는 13세라는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지만, 단 3년 만에 프로 발레단의 오디션에 합격할 정도로 경이로운 발전을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 문제로 점철되었고, 다인종 여성으로서 ‘백인 중심’의 발레계에서 편견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했고, 2015년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수석 무용수로 승격되어 역사상 첫 흑인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었습니다.
대표작품으로는 불새 (Firebird)가 있습니다. 코플랜드의 가장 강렬한 시그니처 작품입니다. 그녀의 근육, 민첩성, 폭발적 에너지가 무대를 지배했습니다. 호두까기 인형 작품에서도 다양한 시즌 버전에서 주역을 맡으며 대중성과 예술성 모두 확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키호테, 백조의 호수 등 전통 레퍼토리에서도 활약했습니다.
그녀는 ABT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무대와 광고, 브랜드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발레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코플랜드는 단지 발레리나가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 그 자체였습니다. 발레에 적합한 체형이나 인종이 따로 있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수고, 다양한 체형, 배경, 인종이 발레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Life in Motion』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발레 교육, 장학 프로그램, 다양한 사회적 캠페인을 통해 발레의 문턱을 낮추고 포용성을 확장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안나 파블로바는 발레의 세계화를 실현했고, 마고트 폰테인은 고전의 품격을 완성했으며, 미스티 코플랜드는 발레의 미래를 새로 그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고통과 편견,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롯이 춤으로 자신을 증명했고,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발레의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발레를 단순히 ‘예쁜 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발레가 얼마나 진지하고 강인한 예술인지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그들의 무대를 직접 관람하거나, 유튜브 영상이나 다큐멘터리로 감상해 보세요. 한 시대를 풍미한 진짜 발레리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임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