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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인간 존재의 관계를 고찰한 작품, <헌등사>

by beato1000 2025. 10. 16.

헌등사 표지
<헌등사>

 

 

언어와 세대, 기억의 단절을 주제로 삼은 근미래 디스토피아 소설

다와다 요코(多和田葉子 / Tawada Yōko)의 소설 <헌등사(獻燈使)>는 언어와 세대, 기억의 단절을 주제로 삼은 근미래 디스토피아 서사입니다. 2014년 일본에서 발표된 이 작품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불안과 변화, 그리고 언어의 붕괴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제목 ‘헌등사’는 ‘등불을 바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잊혀 가는 말과 전통,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다시 밝히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대재해 이후 일본이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근미래의 섬나라입니다. 외국과의 교류가 끊기고, 영어 등 외래어의 사용이 금지된 채, 언어는 점차 퇴화하고 있습니다. 세대 간 소통은 어려워지고, 젊은 세대는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며 단순한 소리와 표정만으로 대화합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주인공 ‘유나’는 살아남은 노년 세대 중 한 사람으로, 과거의 언어와 기억을 간직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과거의 풍경과 문화를 후세에 전하려 하지만, 이제 그 이야기를 들을 사람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유나는 ‘헌등사’라는 역할을 맡아, 잊힌 마을과 무너진 신사를 찾아가 등불을 밝히며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녀의 여정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언어와 역사,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행위로 그려집니다. 그 과정에서 유나는 젊은 세대의 한 남자 ‘미무라’를 만나게 되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점차 감정의 교류를 이루게 됩니다.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언어의 사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입니다. 다와다 요코는 단어 하나하나가 사라질 때, 그 단어에 담긴 기억과 감정, 그리고 공동체의 문화가 함께 소멸한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그립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를 형성하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헌등사>는 재난 이후의 일본 사회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으면서도, 그 상처와 불안을 깊이 반영합니다. 물리적 폐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 단절, 특히 언어의 붕괴라는 점을 작가는 강렬하게 강조합니다. 유나가 등불을 밝히는 행위는 곧 ‘언어의 복원’이자 ‘기억의 재건’입니다. 다와다 요코는 이를 통해 독자에게 묻습니다. “말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결국 이 작품은 언어와 존재의 관계를 탐구한 철학적 소설이자, 재난 이후 인간이 다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를 성찰하는 문학적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세대간 단절에 대한 강한 은유를 담은 작품

<헌등사>는 다와다 요코가 언어 예술가로서 쌓아온 독보적 감수성과 사회비판적 통찰이 결합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아니라, 언어와 기억의 위기를 통해 인간 정체성을 질문하는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비평가들은 이 소설을 “언어의 철학을 문학으로 옮긴 시적 선언”이라고 부릅니다. 다와다 요코는 언어가 사회 구조와 권력관계를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외래어 금지령이 내려진 세계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 외부와의 단절, 타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국가의 통제라는 문제를 상징합니다. 이런 점에서 <헌등사>는 언어를 매개로 한 ‘전체주의 비판 소설’로도 읽힙니다.
작품의 문체는 다와다 요코 특유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장 속에서 일본어의 음운적 아름다움과 의미의 해체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언어 자체가 하나의 예술 행위로 작용합니다. 작가는 단어의 모양과 소리를 활용해 ‘언어가 부서지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구현합니다. 그 결과 독자는 단순히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라지는 체험 그 자체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헌등사>는 또한 세대 간 단절에 대한 강한 은유를 품고 있습니다. 작품 속 노년 세대는 과거의 언어를 기억하지만, 젊은 세대는 이미 그것을 이해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세대 간 거리감을 상징합니다. 즉, 언어의 단절은 곧 인간관계의 단절이며, 그로 인해 공동체가 붕괴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각국의 문학 비평가들로부터 “21세기 초 언어소설의 정점”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다와다 요코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이중 언어 작가라는 점에서, 언어의 상실과 재창조라는 주제는 그녀의 문학적 정체성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헌등사>는 언어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과 존재의 근간임을 일깨우는 작품입니다. 그것은 ‘말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상기시키는 현대적 우화이기도 합니다.

 


언어와 문화, 정체성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가, 다와다 요코

다와다 요코(多和田葉子 / Tawada Yōko, 1960~ )는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이자, 세계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 언어 실험가입니다. 그녀는 일본어와 독일어, 두 언어로 작품을 집필하는 드문 작가로, 언어와 문화, 정체성의 경계를 탐구하는 문학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도쿄에서 태어난 다와다 요코는 와세다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뒤, 1982년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녀는 일본을 떠난 이후에도 일본어로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동시에 독일어로 작품을 창작하는 독특한 이중 언어 작가로 활동해 왔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양면성은 그녀의 문학 세계를 규정짓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언어적 혼란을 주로 다뤘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눈의 여행자>, <목 없는 여인과 말하는 남자>, <혓바늘이 돋은 남자>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언어의 경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 체계를 탐색하는 서사로 평가받습니다.
<헌등사>는 다와다 요코의 후기 작품 중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 소설에서 그녀는 ‘언어의 소멸’을 매개로 현대 사회의 소통 위기, 외국인 배척, 국가주의, 그리고 세대 단절 문제를 다층적으로 드러냅니다. 언어가 인간의 정체성과 사고를 형성한다는 점을 일찍이 인식한 그녀는, 언어의 붕괴가 곧 인간성의 붕괴임을 문학적으로 제시합니다.
다와다 요코는 또한 다양한 언어 실험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일본어판과 독일어판이 서로 다른 내용과 구조를 지니는 경우가 많으며, 번역 과정에서의 변형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시도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창조성을 동시에 탐구하려는 작가의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2018년 독일어권 최고 문학상인 ‘괴테상’을 수상하며, 유럽 문학계에서도 그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후에도 <헌등사>를 비롯한 작품들이 영어권에서 재조명되며, “언어의 경계를 초월한 작가”, “21세기의 카프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와다 요코의 문학은 한마디로 “언어로 세계를 다시 쓰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언어의 해체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내며,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말로 세상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헌등사>는 그 질문에 대한 그녀의 가장 시적인 답변이자, 언어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 빛나는 문학적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