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의 근원적 탐구를 담은 철학적 우화
<태고의 시간들(Primeval and Other Times)>은 폴란드의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가 1996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인간과 시간, 신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과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폴란드의 가상 마을 ‘태고(프라임벌, Primeval)’를 중심으로, 20세기 초부터 약 80년에 걸친 세월을 여러 인물의 시선을 통해 그려냅니다. 이 마을은 폴란드의 역사적 변동과 세계대전, 종교적 갈등,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세계의 축소판’이자 ‘시간의 실험실’처럼 묘사됩니다.
작품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고, 마치 여러 신화와 전설이 교차하듯 분절된 짧은 장면들의 집합으로 구성됩니다. 각 장면은 마을의 인물들—미사코, 게노비파, 이자벨, 미하엘, 그리고 마을의 수호천사 등—의 시점을 통해 진행되며, 인간의 삶과 죽음, 신의 침묵, 자연의 의식 등을 병렬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조는 시간의 선형성을 거부하고, 과거와 현재, 신화와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환적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태고’라는 공간은 실재하지 않지만, 폴란드의 역사적 현실을 은유적으로 반영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나치의 점령, 공산 체제의 등장 등 현실의 폭력이 마을을 휩쓸지만, 인물들은 신화적 존재처럼 그 변화 속에서도 일상을 이어갑니다. 토카르추크는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개별적이고 신비한 경험임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시간’에 대한 시각입니다. 토카르추크는 시간을 직선적 진행이 아니라, 수많은 층위가 공존하는 생명체처럼 묘사합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잠재하며, 미래 또한 이미 이곳에 존재하는 가능성으로 드러납니다. 그녀는 이러한 ‘순환의 시간’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신, 그리고 우주와 맺는 관계를 탐구합니다.
또한 <태고의 시간들>에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토속 신앙, 자연주의적 철학이 공존합니다. 마을의 천사들은 인간의 삶을 지켜보지만, 결코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의 침묵을 상징하며,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함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자연의 영혼과 동물, 식물의 존재 또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며,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선 ‘다층적 생명세계’가 형성됩니다.
결국 <태고의 시간들>은 한 마을의 연대기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탐구를 담은 철학적 우화입니다. 신화적 상상력과 역사적 현실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단순한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이 끊임없이 스며드는 ‘다중의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을 통해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문학적으로 구현하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적 연결성을 섬세하게 노래합니다.
환경위기와 인간 소외가 심화된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
<태고의 시간들>은 현대 문학에서 보기 드문 ‘우주적 감수성’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중심의 서사를 해체하고, 세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독특한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절대적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로 위치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환경문학, 생태철학, 신화적 상징주의가 결합된 토카르추크 문학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폴란드 문학이 낳은 현대의 신화”라고 평가합니다. 토카르추크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신화적 차원으로 변형시킵니다. 그녀에게 시간은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흐름이며, 모든 생명은 그 안에서 순환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인간이 역사와 자연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탐구로도 읽힙니다.
또한 <태고의 시간들>은 언어의 아름다움과 시적 밀도로도 찬사를 받습니다. 토카르추크는 극도로 절제된 문체 속에서도 상징과 이미지의 깊이를 확보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이 세계의 단면을 열어젖히는 듯한 힘을 가집니다. 그녀의 서술은 마치 꿈과 현실, 신화와 일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의식의 공간’을 형성하며, 독자에게 낯선 차원의 감각을 경험하게 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시간의 비선형성’에 대한 실험입니다.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는 분리되지 않으며, 인물들의 죽음조차 끝이 아닙니다. 모든 사건은 서로를 반향하고, 존재들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되살아납니다. 이처럼 토카르추크는 서양 문학 전통의 직선적 시간관을 거부하고, 슬라브 신화와 동양적 순환 개념을 결합해 새로운 시간철학을 제시합니다.
또한 그녀는 여성적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봅니다. <태고의 시간들>의 중심에는 강인하면서도 연약한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을의 신비와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로, 남성 중심의 역사를 넘어서는 힘을 보여줍니다. 토카르추크는 여성의 경험을 단순한 사회적 역할로 그리지 않고, 존재론적 중심으로 격상시킵니다. 이러한 시각은 그녀가 ‘여성적 신화 창조자’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문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학적 논리나 역사적 기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 경험의 깊이를, 토카르추크는 신화적 언어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태고의 시간들>은 단지 한 소설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서정적 철학’의 형태로 읽힙니다.
오늘날 환경위기와 인간 소외가 심화된 시대에, 이 작품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삶은 거대한 순환의 일부일 뿐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태고의 시간들>은 ‘인간 이후의 문학(post-human literature)’의 선구적 모델로 평가받습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 1962~ )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이자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인간과 자연, 신화와 철학을 결합한 독창적인 서사로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숨겨진 질서를 탐구하는 작가로, “이야기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토카르추크는 폴란드 서남부의 수레치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의 무의식과 상징체계에 대한 탐구가 그녀의 문학 세계의 핵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졸업 후 임상심리사로 일하다가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고, 1993년 첫 장편 <E.E.>로 비평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6년 발표한 <태고의 시간들>은 그녀를 폴란드 문학의 중심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이후 <방랑자들>, <플라이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등에서 그녀는 시간, 공간, 정체성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 서사를 이어갔습니다. 토카르추크의 작품은 언제나 인간과 세계, 신과 자연의 관계를 질문하며, 개인의 삶을 보편적 우주 질서 속에서 재배치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문학을 단순한 이야기의 전달이 아니라, 세계를 재조직하는 행위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에는 지도, 여정, 경계, 이동, 순환 같은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그녀가 인간의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흐름과 관계의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토카르추크는 또한 강한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입니다. 그녀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철학은 <태고의 시간들>을 비롯해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됩니다.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나무, 돌, 새, 물, 그리고 신화 속 존재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녀의 문학은 종종 ‘폴란드적’이면서도 ‘보편적’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역사적 비극을 겪은 폴란드의 정체성, 종교와 정치의 억압,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신화적 기억들이 그녀의 작품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을 보편적 차원의 인간 문제로 확장시킵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이야기는 세계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문학은 인간이 잃어버린 연결성을 복원하는 수단이며, <태고의 시간들>은 그 사상의 출발점입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근원적 신화’이자,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쓰려는 위대한 시도의 기록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