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서 한 인간의 사랑과 삶, 신념을 그린 소설
저는 서울 중구의 대한극장이 리모델링하기 전 마지막으로 <닥터 지바고>를 상영했을 때 보러 갔던 추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다른 극장에서 보기 힘들었던 70mm 대화면으로 영화를 봤었는데, 압도적인 영상미에 마음을 뺏겼었습니다. 특히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로 가던 중, 기차의 문을 열자 얼음이 얼어 있는 장면이 아직도 인상에 남네요. 영화만큼이나 소설도 훌륭합니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책을 통해서 많이 접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차르 체제의 낡아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던 것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닥터 지바고 (Доктор Живаго)>는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내전, 체제 변화 속에서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과 사랑, 신념과 혼란을 그려낸 서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유리 지바고는 의사이자 시인으로, 내면의 진실을 따르려는 이상주의자이며, 그는 혼란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소설은 유년기의 상실로부터 시작합니다. 유리 지바고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들의 손에 자라게 됩니다. 이후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고, 평범하지만 안정적인 삶을 꿈꾸며 결혼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전쟁터로 끌려가고, 전쟁 후에는 체제 변화로 인해 의사로서의 활동도 억압을 받게 되며, 그는 점차 체제와 인간 사이에서 균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는 지바고와 라라의 관계입니다. 라라는 지바고가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으로, 그녀 또한 혁명의 희생자이며 격변의 시대 속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인물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영혼의 동반자이자 시대의 상처를 공유한 이들 사이의 깊은 연대감을 보여줍니다. 지바고는 라라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금 인간의 본질, 삶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됩니다.
<닥터 지바고>는 단순한 러브스토리나 혁명기 소설을 넘어서, 문명과 체제, 예술과 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파스테르나크는 주인공 지바고의 시선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고통과 사랑, 그리고 예술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시대는 잔혹하고 혼란스럽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지바고의 시들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시는 소설 전체를 요약하는 동시에, 언어의 순수성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기리는 문학적 결말로 기능합니다.
소련의 실태를 고발함으로써 문학의 존재 의미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
<닥터 지바고>는 발표 직후부터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문학적 완성도와 시대를 꿰뚫는 통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인해 국제적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처음에 소련 내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간되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는 당시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체제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 개인 중심의 서사 때문이었습니다.
비평가들은 <닥터 지바고>가 단순한 정치 소설이나 역사 소설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탐색한 현대적 인간 드라마로 평가합니다. 유리 지바고는 영웅적인 인물이기보다는 인간적인 결점을 가진 복합적인 인물이며, 그의 방황과 고뇌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 전체의 정신적 혼란을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체제가 요구하는 집단적 충성보다는 개인의 양심, 사랑,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이는 당시에도, 지금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특히 이 작품은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파스테르나크는 문학이 단지 체제 선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 정신과 진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지바고는 시인으로서 언어의 진정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이는 작가 자신의 문학적 신념과도 일치합니다. 결국 <닥터 지바고>는 문학의 자율성과 예술의 순수성을 강하게 옹호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독자 반응 역시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일부 독자들은 지바고의 우유부단함이나 수동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갖지만, 대부분은 그가 시대 속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이해하며 공감합니다. 특히 지바고와 라라의 서사는 단순한 낭만주의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동반자적 관계로 읽히며,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 소설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화까지 되었던 점은 그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닥터 지바고>는 문학이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이자,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임을 입증한 작품입니다. 혁명과 전쟁, 체제와 억압이라는 외부 현실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이는 이 작품이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는 189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소설가로, 20세기 러시아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입니다. 그는 유대계 예술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화가,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예술에 둘러싸여 자란 그는 한때 작곡가를 꿈꾸었지만, 후에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두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문학의 길을 선택하며 1910년대부터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로 시를 통해 존재와 언어, 진실의 문제를 꾸준히 탐구해왔으며, 초기에는 형식 실험과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중시했으며, 이 점이 그를 당시 러시아 문학계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게 만들었지만, 진정성 있는 문학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이후 더 큰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 시집 중 하나인 <삶의 동반자>는 러시아 서정시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문학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소설 <닥터 지바고>의 집필과 출간입니다. 이 작품은 1940년대 후반부터 집필되었으며, 파스테르나크는 이 소설을 통해 예술과 인간성, 자유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이 소설이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여 출간을 금지했고, 원고는 밀반출되어 1957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되며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됩니다.
1958년, 그는 <닥터 지바고>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지만, 소련 정부의 압력과 협박으로 인해 수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가해진 정치적 탄압은 문학의 자유와 예술가의 권리에 대한 세계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파스테르나크는 국내에서 외면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문학적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조용히 창작을 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