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는 러시아 작곡가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가 푸쉬킨(Alexander Sergeyevich Pushkin)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로, 19세기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결정체로 평가받습니다. 정치적 음모와 죄의식, 민중의 고통을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오페라를 넘어 러시아 역사의 심장을 관통하는 음악극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보리스 고두노프》의 탄생 배경, 극적인 스토리 라인, 그리고 인상 깊은 대표 아리아를 중심으로 심층 해설해 드립니다.
'보리스 고두노프' 작품 배경
《보리스 고두노프》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음악의 민족주의 운동 속에서 탄생한 오페라입니다.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는 러시아 고유의 언어, 민요, 역사적 주제를 바탕으로 유럽 중심의 오페라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음악극을 꿈꾸었습니다.
작품의 원작은 러시아 문학의 거장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로,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집권과 몰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푸쉬킨의 원작은 셰익스피어 희곡처럼 정치와 인간 심리를 깊이 있게 조명했으며, 무소륵스키는 이를 기반으로 러시아어 그대로의 억양, 문체, 민중의 언어를 오페라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작품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습니다. 1869년의 원판은 여성 주인공과 로맨틱한 요소 없이 남성적이고 무거운 분위기였으며, 이후 1872년 버전에서는 폴란드 궁정 장면과 여성 등장인물이 보강되며 전통 오페라에 가까운 구성을 갖추게 됩니다. 이후 림스키-코르사코프, 쇼스타코비치 등 다양한 작곡가들이 편곡하거나 재해석했지만, 최근에는 무소륵스키의 원작 그대로를 복원해 공연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권력과 죄의식, 민중의 고통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신을 탐구한 오페라입니다. 특히 무소륵스키는 서구식 멜로디보다 러시아 언어의 억양, 정치적 집단 장면, 합창 중심의 구조를 통해 러시아 민중의 정서와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토리
《보리스 고두노프》의 줄거리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 러시아의 "동란시대(Time of Troubles)"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은 실존했던 러시아의 차르(황제) 보리스 고두노프로, 그는 이반 뇌제의 사후 혼란 속에서 권력을 잡게 된 인물입니다.
이 오페라의 중심 갈등은 보리스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이반의 어린 아들 드미트리 왕자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으며 시작됩니다. 작품은 사실 여부보다는, 그 죄의식이 보리스의 정신과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초반에는 보리스가 억지로 왕위에 오르도록 민중이 강요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이는 정치권력의 위선적 구조를 풍자합니다. 보리스는 외면상 안정된 통치자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점점 죄의식과 망상에 사로잡혀 갑니다.
중반에서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 귀족들, 폴란드의 외세 간섭, 가짜 드미트리(도망자 그리고리)의 등장이 이어지며 권력의 위기를 고조시킵니다. 특히 ‘가짜 드미트리’는 보리스의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등장하여 정치적 긴장을 상징합니다.
후반에서는 보리스가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며 점차 광기에 빠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결국 그는 민중 앞에서 참회하며 "나는 죄인이다"라고 고백하고, 아들 표도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개인적인 사랑이나 로맨스가 없고, 철저히 정치, 민중, 권력의 윤리적 무게에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민중 합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권력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자로 기능하며,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우리의 고통은 언제 끝날까?"라는 울부짖음이 이어지며 마무리됩니다.
대표 아리아
《보리스 고두노프》는 전통적인 아리아 중심 구조보다는 레치타티보와 합창, 극적 독백을 중심으로 구성된 오페라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도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솔로 장면이 존재하며, 특히 보리스 역은 바리톤 혹은 베이스 성역의 최고의 연기력을 요구하는 배역입니다.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보리스의 독백 “Я достиг высшей власти(나는 최고 권력을 얻었건만)”입니다. 이 곡은 차르로 즉위한 후, 혼자 남은 보리스가 내면의 죄의식을 독백 형식으로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외적으로는 위엄을 갖춘 통치자지만, 음악은 그의 불안, 공포, 자책감을 서서히 드러냅니다. 저음의 긴 음형, 단조의 음색, 점점 치닫는 감정선은 보리스가 감정적으로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또 하나의 명장면은 광인(Юродивый, Holy Fool)의 등장 장면입니다. 이 캐릭터는 러시아 정교 전통에서 진리를 말하는 '성스러운 바보'로, 그는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말하는 인물입니다. 광인은 권력자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드미트리를 죽인 자를 슬퍼하자”라고 노래하며, 민중의 양심과 같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의 멜로디는 단순하고 구슬프며, 말하듯이 노래하며, 그 자체로 강한 울림을 줍니다.
또한, 민중 합창 "Слава! Слава!"(영광이여! 영광이여!)는 러시아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합창 중 하나로, 왕위 즉위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이 곡은 표면적으로는 보리스를 찬양하지만, 역설적으로 군중의 강요된 외침 속에서 권력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그 외에도 수도원 장면에서의 폰 크릴로프 수도사의 예언, 표도르와의 부자 간 이중창,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무리 합창 등도 극적 흐름과 긴장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음악적 요소입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인간 내면의 고통, 정치적 도덕성, 민중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러시아 오페라의 정수입니다. ‘보리스의 독백’, ‘광인의 노래’, ‘민중의 외침’은 지금까지도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강력한 감정적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체 공연을 감상하기 어렵다면, 보리스의 독백 장면부터 먼저 접해보세요. 권력과 인간성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예술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