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킬리안(Jiří Kylián)은 현대무용의 시적 감성과 철학적 사유를 무대 위에 구현한 유럽 대표 안무가 중 한 명입니다. 체코 태생으로,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ederlands Dans Theater, NDT)를 통해 수십 년간 세계 무용계를 이끌어온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무용으로 풀어낸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안무는 기술적인 정교함을 넘어, 반복과 정지, 상징적 이미지, 음악과의 교감 속에서 관객의 감각을 일깨우는 예술적 언어입니다. 본문에서는 킬리안의 대표 작품들과 더불어, 그의 안무 철학과 무용 언어의 핵심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리 킬리안 안무 스타일
이리 킬리안의 안무 스타일은 구조적이면서도 유기적입니다. 그는 무용수의 움직임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설계하면서도, 그 속에 비의도적 우연성과 감정의 파열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합니다. 그의 무용은 서사 중심의 무용극이나 전통 발레처럼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단편적인 이미지, 상징, 제스처를 통해 감정을 직조합니다. 특히 킬리안은 리듬과 반복의 장인이라 불릴 만큼, 움직임의 리듬과 패턴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조작합니다. 대표작 중 하나인 Falling Angels에서는 여성 무용수 8명이 드럼 비트에 맞춰 집단적으로 리듬을 주고받으며 움직이는데, 그 반복적인 동작 속에서 고조되는 긴장감과 인간 내면의 갈등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치 음악의 한 단락처럼 시작과 끝, 전개와 반전을 포함하고 있어, 관객이 ‘보는 리듬’을 경험하게 합니다. 또한 그는 공간의 활용에 있어서도 매우 독창적입니다. 무용수가 단순히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닌,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창조합니다. ‘비워진 무대’가 주는 정적과 침묵조차 그의 무용에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안무에서의 정지, 느린 움직임, 고요한 시선 처리 등이 결합되어 관객은 마치 움직이는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몰입감을 얻게 됩니다.
킬리안은 고전 발레의 테크닉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신체 언어’를 창조합니다. 발끝에서 손끝까지 모든 움직임이 통제되면서도 자유롭고, 파괴적이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의 안무는 무용수 개인의 개성과 감정까지도 투명하게 비추게 만드는 거울과 같습니다.
표현 방식
이리 킬리안의 작품에는 철학적 사유와 시적 정서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인간의 삶, 죽음, 사랑, 상실, 고독 같은 주제를 추상적으로 풀어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말 대신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말보다 더 깊은 층위의 감정에 접근합니다. 예를 들어, Petit Mort는 검과 남성의 몸, 검은색 천을 통해 남성과 여성, 생명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은유합니다. 남성 무용수가 펜싱 검을 들고 등장해 검의 움직임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표현하고, 검정 천이 여성 무용수를 감싸거나 떨어지며 감정의 격동을 상징합니다. 이렇듯 킬리안은 오브제와 신체, 음악을 결합한 시적 상징체계를 구축하는 데 능합니다. 그는 또한 ‘비언어적 언어’로 감정을 묘사합니다. 가령 무용수가 같은 동작을 다섯 번 반복하되, 그 속도와 시선, 리듬이 다르게 조절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감정은 말보다 훨씬 빠르게, 더 본능적으로 몸을 통해 발현되며, 킬리안은 이러한 신체의 언어를 섬세하게 포착해 냅니다. 그의 무대는 때로는 아름답고 고요하지만, 이면에는 불안과 긴장이 감돌며, 인간 존재의 고독한 측면을 조명합니다. Stamping Ground, Sleepless, Bella Figura 같은 작품들은 일상과 초현실, 명료함과 모호함이 공존하는 분위기 속에서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제공합니다. 킬리안은 자신의 안무가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감각을 흔들어 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킬리안의 작품 세계는 끊임없이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무용수가 사회적 존재로서, 감정의 주체로서 무대 위에 서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으며, 춤은 감정을 담는 그릇임을 증명합니다. 그의 안무 속 인물들은 자유롭고도 억눌려 있으며, 아름답고도 왜곡되어 있고, 해방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불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허용하며, 관객의 경험과 연결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둡니다. 이리 킬리안의 작품을 감상한 관객은, ‘무엇을 봤는지’보다 ‘무엇을 느꼈는지’를 중심에 두게 됩니다. 이는 그가 무용을 감각의 예술, 해석의 자유가 허용된 열린 서사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음악 사용법
이리 킬리안의 또 다른 특징은 음악과의 독창적인 결합 방식입니다. 그는 음악을 안무의 배경음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무용의 대화를 추구합니다. 클래식, 민속음악, 현대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넘나들며, 움직임과 소리의 관계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왔습니다. Petite Mort에서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흐르며, 그 정교한 선율과 무용수의 동작이 정밀하게 맞물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리듬을 맞춘 춤’이 아닌, 음악의 감정에 반응하는 ‘몸의 청각’입니다. 킬리안은 종종 음악보다 앞서거나 늦게 움직임을 주고, 때로는 음악과 충돌하도록 구성하여 시청각의 긴장을 유도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소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유도하며, 몸과 음악이 하나가 된 상태를 체험하게 만듭니다. 또한 음악의 선택에서도 주제를 강화하기 위한 서사적 음악보다는 감정의 진폭을 끌어올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유럽의 민속음악, 탱고, 현대 전자음악까지 그의 무대에서 쓰이지 않는 음악 장르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킬리안의 음악 감각은 무용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확장하며, 관객의 몰입감을 한층 끌어올립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나면 ‘음악을 보는 경험’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리 킬리안은 무용이 단지 기술과 형식의 예술이 아님을 보여준 안무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감정과 상징, 시간과 공간, 음악과 신체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에게 다층적인 감각과 사유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무용에 대한 편견을 깨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예술로 만나고 싶다면 킬리안의 작품은 반드시 감상해보아야 할 예술적 여정입니다. Falling Angels, Petite Mort, Bella Figura 등을 시작으로 그의 무대언어를 느껴보시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