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담이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공포소설
가끔 유행하는 괴담을 읽다 보면 이 괴담의 시초는 어디일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유행했던 '빨간 휴지 줄까, 노란 휴지 줄까'의 화장실 귀신 괴담은 일본의 '하나코 씨' 괴담이 원조입니다. 그러면 일본의 '하나코 씨' 괴담의 원조는 무엇일까요? 괴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어서 한국까지 건너와 자신의 존재감을 퍼트리고 있을까요? 화장실 괴담 이후에도 홍콩 할매 귀신 괴담이나 빨간 마스크 여자 괴담 같은 시대를 풍미한 괴담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화장실 괴담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건너온 괴담도 있고, 국내에서 만들어진 괴담도 있습니다. 이런 괴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해 보는 흥미로운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 오노 후유미의 <잔예>입니다.
<잔예(殘穢)>는 일본의 작가 오노 후유미(小野 不由美, Fuyumi Ono)가 2012년에 발표한 소설로, 일상 속에 스며든 공포와 그 기원을 탐색하는 독특한 형태의 호러 미스터리입니다. ‘잔예’란 말은 ‘남은 더러움’ 또는 ‘사라지지 않은 찌꺼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책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아냅니다. 이 작품은 일본 호러 문학에서 보기 드문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서사 구조를 통해, ‘공포’가 특정한 존재나 현상이 아닌, ‘장소’와 ‘시간’의 누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소설은 ‘작가인 나’라는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호러 소설을 쓰는 작가이며, 독자에게서 받은 사소한 제보 하나로 인해 이상한 현상에 점차 깊숙이 휘말려 들어갑니다. 제보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매트리스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있는 괴담처럼 들릴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주인공은 해당 아파트의 과거 사건, 전 세입자의 이력, 그 이전의 토지 내력 등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공포가 '귀신'이나 ‘심령 현상’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장소의 과거와 축적된 ‘더러움’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설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 속에는 실제처럼 느껴지는 인터뷰, 조사 내용, 기록 등이 등장하고, 마치 르포르타주를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구성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실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줍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거주 중인 공간과 관련된 기묘한 사건들을 점차 조사하며, 그 흔적이 단지 한 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연쇄적인 불행과 죽음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사건들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연결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특정한 토지, 지역, 심지어는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도 닿아 있으며,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죄, 고통, 죽음, 그리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독자에게 깊은 불안을 안겨줍니다.
<잔예>는 눈에 보이는 공포가 아닌, 인지하고 나서야 서서히 퍼져오는 ‘지식에 의한 공포’를 추구합니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현상은 매우 조용하고 소박하지만, 그 근원을 추적하면서 독자는 마치 거대한 악의 고리를 뒤쫓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일반적인 호러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프 스케어나 괴물, 귀신 등의 전형적 장치 없이도, 오히려 더욱 깊고 지속적인 공포감을 만들어냅니다.
이야기는 끝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완전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주인공과 조력자는 끝내 그 뿌리를 발견하지만, 그것을 제거하거나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공포는 설명되었을 뿐,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는 독자에게 더 큰 충격을 주며,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그 여운이 오래 남게 만듭니다.
호러 문학의 한계를 확정한 작품
<잔예>는 발표 이후 일본 내에서 큰 화제를 모았으며, 이후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의 일본 호러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포를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호러 문학과 영화는 일반적으로 귀신, 원혼, 저주 등 초자연적 존재를 통해 공포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잔예>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땅의 기억’과 ‘사회의 잔재’를 통해 공포의 실체를 탐구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독자에게 단순한 감각적 충격이 아닌,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의 긴장감을 유도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 호러” 혹은 “역사적 공포”라고 부르며, 공포가 단지 개인의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 공간, 시간 속에 스며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예컨대 한 사람이 겪은 이상 현상이 알고 보면 수십 년 전부터 반복된 죽음과 불행의 연쇄였으며, 그것이 특정 지역이나 건축물에 남아 있다는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잔예>는 장르문학으로서도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 구성은 매우 정교하며, 단편적이고 흩어진 정보들이 이야기 후반에 이르러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됩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인과와 연결, 구조를 따라가며 독서에 몰입하게 됩니다. 또한 1인칭 서술 방식과 마치 실제 사건을 기록한 듯한 르포 형식은, 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며,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강점은 일본의 전통적인 공간감과 ‘장소에 대한 집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주거 문화, 지역 커뮤니티, 공동묘지, 낡은 집 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공포의 실체를 품고 있는 존재로 기능합니다. 특히 장소에 깃든 사연과 감정, 역사가 고스란히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은 동양적 감성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읽는 동안 무서움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더라도,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잔예>가 추구하는 ‘지연된 공포’입니다. 이 소설은 단발적인 무서움이 아닌, 독자에게 현실 속 공간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무심코 지나치던 집의 소리, 벽의 얼룩, 바닥의 삐걱거림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듭니다.
결국 <잔예>는 호러 문학의 한계를 확장한 작품입니다. 개인의 불행이나 귀신 이야기를 넘어서, 그 불행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구조 속에서 반복되었는지를 추적하며, 공포를 사회학적, 역사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로 인해 <잔예>는 단순한 오락소설을 넘어선, 읽고 나면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사유하는 호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오노 후유미 작가 소개
오노 후유미(小野 不由美, Fuyumi Ono)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로,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한 작가입니다. 그녀는 1960년 일본 오이타현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교토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이후 문학계에 데뷔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라이트노벨 형태의 작품을 발표하며 젊은 독자층을 형성했지만, 이후 본격적인 장르문학 작가로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오노 후유미는 특히 <십이국기> 시리즈로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으며, 그 시리즈를 통해 정치와 권력, 인간의 성장과 고뇌를 담아내며 장르 문학의 깊이를 확장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판타지뿐 아니라, 심리 호러와 사회적 테마가 결합된 작품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여줍니다. 그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잔예>입니다.
오노 후유미의 글쓰기 방식은 치밀한 세계관 설정과 사실감 있는 묘사, 그리고 인물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일상 속의 공포, 사회 구조의 모순, 인간 심리에 대한 세심한 묘사는 그녀만의 장점으로 손꼽힙니다. <잔예>를 비롯한 그녀의 호러 작품은 단순한 무서움이나 자극에 의존하지 않으며, 독자로 하여금 일상의 틈을 의심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믿게 만듭니다.
오노 후유미는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는 편이며,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녀는 ‘무서운 이야기’가 단순한 공포를 넘어, 인간과 사회, 기억과 장소에 대한 성찰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철학은 작품 전반에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일본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사유형 장르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장르 문학의 외피를 두르되, 그 속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담고 있어, 단순한 장르 팬을 넘어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잔예>는 그런 오노 후유미의 작가적 정체성과 철학이 가장 강하게 응축된 작품으로, 단지 무섭기만 한 이야기가 아닌, 독자의 삶에 긴 여운을 남기는 문학적 공포를 실현한 수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