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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 작품,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by beato1000 2025. 12. 6.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표지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은하계에서 벌어지는 우주전쟁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묻는 소설

SF 장르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전 우주라는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해 본 그 어떤 것보다 넓은 공간을 배경으로 작품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우주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는 두 문명 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역사서를 봐도, 전 세계에서 동시에 벌어진 전쟁의 규모가 주는 규모의 압도적인 기록에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규모의 전쟁이 전 우주적으로 펼쳐진다면 어떨까요?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Consider Phlebas)>는 스코틀랜드 작가 이언 뱅크스(Iain Banks)가 1987년에 발표한 첫 번째 SF 소설로, 이후 그가 10편 이상 집필한 ‘컬처(Culture)’ 시리즈의 서막을 여는 작품입니다. 컬처 시리즈는 고도로 진화한 기술 문명을 배경으로, 윤리적, 정치적,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며 현대 SF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이 거대한 우주관의 서사적 기반을 소개하며, 우주 전쟁이라는 대서사를 통해 인간성과 문명의 본질을 묻는 작품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은하계 전역에서 벌어지는 두 거대 문명 간의 전쟁입니다. 하나는 컬처(Culture)라는 고도로 진보된 인공지능 기반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디란 제국(Idiran Empire)이라는 종교적 군국주의 국가입니다. 컬처는 기술적으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문명이지만, 인류를 포함한 다양한 유기체와 인공지능이 평등하게 공존하며, 물질적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합니다. 반면 이디란 제국은 극단적인 신념과 폭력을 통해 우주를 지배하려는 강압적 문명입니다. 두 세력은 가치관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거대한 전면전으로 치닫게 됩니다.
주인공은 호라자 발(Horza Balveda)이라는 인간형 변신종족 ‘체인저(Changer)’로, 그는 이디란 제국의 편에 서서 컬처와 그들의 기술적 주체인 인공지능을 혐오합니다. 그의 신념은 컬처가 인간다움과 생물학적 본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문명을 진화시키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중심 줄거리는 컬처의 핵심 인공지능 ‘마인드(Mind)’가 우주 어딘가에 추락하였고, 이를 회수하려는 두 진영의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추격과 모험을 다룹니다. 호라자는 마인드를 회수해 이디란에게 넘기려는 임무를 맡게 되고, 그 여정에서 수많은 행성과 종족을 오가며 다양한 존재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SF 액션이 아니라, 다층적인 문명 간의 충돌, 이념적 갈등, 생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채워져 있습니다. 호라자는 임무 수행 도중 다양한 인물과 충돌하고, 생사의 기로에 놓이며, 끝내 자신이 속한 문명과 믿음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특히 컬처와 이디란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투와 희생을 목격하면서,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두 체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일견 대규모 스페이스 오페라로 보일 수 있으나, 작품 전반에는 ‘개인의 선택과 가치, 전쟁 속 인간성’이라는 심오한 주제가 흐릅니다. 호라자는 타인을 흡수해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의 내면은 누구보다도 복잡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는 외부에서는 타인을 모방할 수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며, 끝내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뇌합니다.
소설의 제목은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따온 구절로,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말은 결국 문명과 전쟁 속에서 소멸해 간 존재들에 대한 추모이자, 생과 죽음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장치입니다. 이러한 문학적 인용은 SF 장르 안에서도 <플레바스를 생각하라>가 지닌 철학적 깊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정교한 세계관과 기술적 디테일, 인간 중심의 사유를 결합한 스페이스 오페라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발표 당시부터 기존 SF 소설과 차별화된 세계관과 철학적 깊이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컬처 시리즈의 기점으로서 현대 SF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입니다. 이언 뱅크스는 이 한 작품으로 기존의 스페이스 오페라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술적 디테일과 인간 중심의 사유를 절묘하게 융합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정교한 세계관입니다. 컬처와 이디란이라는 두 상반된 체제를 통해 작가는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서, 정치적, 철학적 충돌을 입체적으로 탐색합니다. 컬처는 겉으로 보기에 완전한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인공지능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의 비인간성과 냉철함이 종종 인간적인 감정과 충돌합니다. 반면 이디란 제국은 폭력적이고 교조적인 체제지만, 그 구성원들은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인간적인 결기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뱅크스는 어떤 체제도 완벽할 수 없으며, 그 체제가 무엇을 지향하든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사는 존재들의 고통과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호라자 발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심축입니다. 그는 정체성이 유동적인 존재이며,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확신과 회의를 반복합니다. 체인저라는 그의 능력은 곧 인간의 유동적 정체성을 상징하며, 이디란과 컬처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의 입장은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서사 장치로 기능합니다. 그의 여정은 한 개인의 성장 서사이자, 이념과 신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문체적으로도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매우 밀도 있고 생생합니다. 뱅크스는 전투 장면이나 우주선 묘사에서 기술적 정밀성을 유지하면서도, 인물 간의 대화와 갈등에서는 섬세한 감정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는 하드 SF와 문학적 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뱅크스 특유의 균형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은 인간 외 생명체와 인공지능의 묘사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다양한 외계 종족과 생물학적 설정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을 넘어 생물학적, 문화적 다양성을 정교하게 설계한 결과입니다. 인공지능 ‘마인드’는 단지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정과 의도를 가진 인격체로서 묘사되며, 그 존재 자체가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비판적인 시선에서는 이 소설의 구조가 다소 비선형적이고, 초반의 전개가 느리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전투 장면이 때로는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세계관의 이해 없이 접근하면 몰입이 쉽지 않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컬처 시리즈 전반의 맥락에서 보면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이 시리즈의 윤리적,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총체적으로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단순한 우주 모험담이 아니라, 전쟁과 문명, 정체성과 윤리라는 복잡한 주제를 SF라는 장르 안에서 구현한 뛰어난 성취입니다. 이언 뱅크스는 이 작품을 통해 단지 미래를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문학적 힘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SF에 관심 있는 독자뿐 아니라, 철학과 문명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한 작가, 이언 뱅크스

이언 뱅크스(Iain Banks, 1954–2013)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설가로, 문학소설과 과학소설 양쪽 장르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은 드문 작가입니다. 그는 ‘이언 뱅크스(Iain Banks)’라는 이름으로는 일반 문학 작품을, ‘이언 M. 뱅크스(Iain M. Banks)’라는 이름으로는 SF 작품을 발표하며,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보적인 작가적 정체성을 구축했습니다.
뱅크스는 스털링대학교에서 영어와 철학을 공부했으며, 대학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 발표한 첫 작품 <말리(Maribone)>로 문학계에 데뷔했으며, 이후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소설들로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계기는 바로 1987년 발표한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를 비롯한 컬처 시리즈입니다.
컬처 시리즈는 고도로 진화된 인공지능 문명인 ‘컬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광대한 우주 서사로, 총 10편의 장편소설과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문명이 진보한다는 것의 의미’, ‘지능이 윤리를 대체할 수 있는가’, ‘문명 간 간섭과 중립의 한계’ 같은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단순한 SF의 틀을 넘어서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이언 뱅크스의 문체는 서사적으로는 과감하고, 문학적으로는 섬세합니다. 그는 SF 장르에서 기술적 정밀함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하는 데 능했습니다. 이러한 균형 감각은 일반 문학 작품에서도 드러났으며, 그는 <더 와스프 팩토리(The Wasp Factory)>, <더 크로우 로드(The Crow Road)> 등 여러 작품에서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탐구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사회적 발언도 활발히 했으며, 반전주의자이자 좌파적 성향의 작가로서 정치적 논평과 기고를 자주 했습니다. 2013년 그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같은 해 6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지금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이언 뱅크스는 SF와 문학의 경계를 허문 작가이자, 미래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게 만든 사유의 작가였습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그의 작가 인생을 열었던 중요한 작품이자, 오늘날까지도 SF 문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선구적인 작품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