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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소설, <바우돌리노>

by beato1000 2025. 11. 11.

바우돌리노 표지
<바우돌리노>

 

 

 

중세 유럽의 상상과 신화를 문학적으로 재창조한 작품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바우돌리노(Baudolino)>는 2000년에 출간된 역사·철학 소설로, 중세 유럽의 상상과 신화를 문학적으로 재창조한 작품입니다. 이탈리아의 지성인 에코는 이번 작품에서 “역사는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명제를 중심에 두고,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탐구합니다. <바우돌리노>는 허구의 세계를 사실처럼 믿었던 중세인의 정신세계를 유머와 철학으로 해석하며, 독자에게 ‘믿음의 힘’이 얼마나 현실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중세 유럽뿐 아니라 근대 이전의 동서양에서는 수없이 많은 환상적인 존재나 지역에 대한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중국에서는 <산해경>과 같은 고대의 책에 묘사된 이형의 존재들이나 신기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어릴 때 저를 사로잡았고, 중세 유럽인들이 믿었던 존의 나라와 같은 기발하게 느껴지는 지역들에 관심이 갔습니다. 옴베르토 에코의 작품은 모두 좋아하지만, <바우돌리노>는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진실과 거짓, 이제는 거짓으로 판명되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지는 매력을 가득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12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현실과 거짓을 넘나드는 소설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는 제3차 십자군 시대, 즉 12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주인공 바우돌리노는 현실과 거짓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인물입니다. 그는 거짓말의 천재이며, 동시에 상상력의 창조자입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iedrich Barbarossa)를 만나 그의 양자가 되면서, 한 평범한 농부의 아들은 유럽의 정치와 역사를 뒤흔드는 인물이 됩니다.
바우돌리노는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야기’로 문제를 해결하고, 허구로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프리드리히 황제의 궁정에서 그는 정치적 계략과 신학적 논쟁에 뛰어들며, 거짓이 때로는 진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체험합니다. 그의 재능은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발전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바우돌리노는 황제를 위해 이 신비한 동방의 왕에게 보낼 편지를 조작합니다. 그 편지는 중세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실제 역사 속에서도 신화처럼 퍼져나갑니다. 에코는 이 사건을 통해 “허구가 현실의 역사를 움직인다”는 아이디어를 소설적 장치로 형상화합니다.
프리드리히 황제가 죽은 뒤, 바우돌리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파편들을 추적하며 새로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는 동방으로 향해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찾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 상상 속의 존재들을 만납니다. 인간과 말로만 존재하는 유니콘, 얼굴이 가슴에 달린 괴이한 종족, 머리가 없는 인간들 등, 중세 지도 속에 그려진 환상의 세계가 현실처럼 펼쳐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바우돌리노의 ‘말’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독자는 그의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끊임없이 혼란을 느낍니다. 소설의 프레임 구조 또한 이중적입니다. 늙은 바우돌리노가 콘스탄티노플의 학자 니키타스 코니아테스에게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즉, 독자는 한 거짓말쟁이의 회고록을 읽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바우돌리노>는 “거짓말은 단순한 기만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인간의 방식”이라는 주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신화 속에서 살고, 그 신화에 의존해 역사를 기록합니다. 진실은 사라지고, 이야기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바우돌리노의 거짓말은 단순한 사기극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 행위’로 승화됩니다.

 


진실의 존재에 대해 철학적이고 문학적으로 파고드는 작품

<바우돌리노>는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풍성한 상징과 철학이 녹아 있는 소설로 평가받습니다. 에코는 이 작품에서 ‘언어의 마술사’로서의 면모를 극대화하며,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구분 짓지 않고 섞어냅니다. 그 결과, 독자는 이야기의 진위를 구분할 수 없게 되며, 그 혼란 자체가 작품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비평가들은 <바우돌리노>를 “거짓과 믿음에 대한 문학적 논문”이라고 부릅니다. 바우돌리노의 거짓말은 단순한 도덕적 문제를 넘어, 인간이 진실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야기로 해석된 세계’를 봅니다. 에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 인식의 본질을 포착합니다.
이 작품은 또한 중세의 지식 체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합니다. 당시 유럽은 신학과 미신, 과학과 전설이 뒤섞인 시기였으며, 인간의 상상력이 곧 현실을 형성했습니다. 에코는 이 시대를 단순한 역사적 배경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사유의 패턴을 탐구합니다. 즉, <바우돌리노>는 중세 정신의 ‘내면’을 복원한 문학적 고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도 이 작품은 매우 실험적입니다. 에코는 라틴어, 고대 독일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등의 언어를 변주하며, 문체 자체를 하나의 문화적 퍼즐로 만듭니다. 이는 독자에게 단순한 이야기의 즐거움을 넘어, ‘언어의 불안정성’을 체험하게 합니다. 바우돌리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동시에 ‘참’이자 ‘거짓’이며, 언어는 결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이야기하는 인간(homo narrans)’에 대한 찬사로 읽힙니다. 바우돌리노는 신학자도, 전사도, 왕도 아니지만, 그는 ‘이야기’로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에코는 그를 통해 인간이 진실보다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는 신화, 역사, 종교, 이념—all of these—모두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비평적 측면에서 <바우돌리노>는 <장미의 이름>의 철학적 후속작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장미의 이름>이 ‘진리의 부재’를 신학적 논쟁 속에서 다뤘다면, <바우돌리노>는 그 부재 속에서도 ‘이야기하는 인간의 존엄’을 탐구합니다. 이는 에코가 후기 구조주의적 사고를 문학적으로 완성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우돌리노>는 진실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개념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만 실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는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이 철학적 메시지는 독자에게 강렬한 사유의 여운을 남깁니다.

 


세계적인 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 옴베르토 에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철학자, 소설가로, 20세기 지성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는 중세 기호학과 해석학에 기반을 두었으며, 대중적으로는 <장미의 이름>을 비롯한 철학적 소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에코는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나, 토리노 대학에서 중세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기호학(semiotics)을 언어학, 철학, 예술 해석의 중심에 세운 인물로, 인간의 사고와 문화가 상징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대표적 이론서인 《기호학 이론(A Theory of Semiotics)》은 현대 인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됩니다.
문학가로서의 에코는 학자적 사유를 대중 서사 속에 녹여내는 데 탁월했습니다.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진리와 해석의 문제를 다루며,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프라하의 묘지>, <숫자 제로> 등 연작을 통해 ‘지식소설(intellectual novel)’이라는 장르를 확립했습니다.
<바우돌리노>는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로, 에코가 평생 탐구해 온 ‘언어와 현실의 관계’가 가장 자유롭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된 작품입니다. 그는 학문적 엄밀함 속에서도 유머와 풍자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우돌리노의 거짓말은 인간 지성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며, 에코 자신이 믿은 ‘이야기의 힘’을 구현합니다.
그의 문학은 ‘지식’과 ‘상상력’이 결합한 복합적 구조를 지니며, 독자는 단순한 독서 행위가 아니라 ‘해석의 참여자’로서 작품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는 이를 “열린 텍스트(Open Text)”라고 불렀습니다. 즉,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완성하는 공동 창조자라는 개념입니다.
에코는 학문적으로도 다방면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볼로냐 대학 교수로 30년 이상 재직하며, 커뮤니케이션 이론, 미학, 언어철학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UN, UNESCO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문화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습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나는 철학자가 아니라, 세상을 이야기로 이해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문학적 정체성을 함축합니다. 그는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해석되고 갱신되는 ‘기호의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2016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유는 여전히 현대 문학과 인문학의 방향을 비추는 지성의 등불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세상을 구성하고,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찾는 존재임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작가였습니다.

<바우돌리노>는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에 대해,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대답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의 상상력을 통해 현대인의 인식 구조를 비추며, 인간이 거짓을 통해서도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언어의 힘, 믿음의 구조, 그리고 상상력의 본질을 탐구하는 거대한 철학적 여정입니다. 결국 <바우돌리노>는 인간이 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지적이고도 유쾌한 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