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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회에 대한 우화, <눈먼 자들의 도시>

by beato1000 2025. 10. 10.

눈먼 자들의 도시 표지
<눈먼 자들의 도시>

 

 

 

문명사회의 허위와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드러내는 철학적 우화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는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가 1995년에 발표한 소설로, 현대 사회의 도덕적 붕괴와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한 걸작입니다. 작품은 ‘백색의 실명’이라는 의문의 전염병이 퍼지면서 순식간에 문명이 붕괴하는 도시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작가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인간들의 세계를 통해, 실제로는 도덕적‧윤리적으로 눈먼 인류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냅니다.
소설은 이름이 없는 인물들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백색 실명’에 걸린 남자가 교차로에서 운전을 하다 시야를 잃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흰빛으로 변했다”라고 말하며 공포에 빠집니다. 이후 그를 도와준 사람, 병원을 찾은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른 환자들까지 차례로 눈이 멉니다. 정부는 이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감염자들을 격리수용소에 가두지만, 그곳은 곧 비인간적인 지옥으로 변합니다.
수용소 안에서 인간들은 규율과 질서를 잃고, 폭력과 탐욕, 배신이 난무하는 혼돈의 상태로 떨어집니다. 특히 식량 배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은, 문명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회귀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고 시력을 유지합니다. 그녀는 유일한 ‘보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지만, 동시에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목격해야 하는 고통을 짊어집니다.
이후 수용소의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고, 사람들은 탈출하여 황폐해진 도시로 향합니다. 거리에는 시체와 폐허가 가득하며, 사회적 제도는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들은 음식을 찾아 헤매며 생존을 위해 협력하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싸움을 이어갑니다. 의사의 아내는 그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 연민과 사랑, 그리고 책임을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명은 갑작스럽게 끝납니다. 사람들이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 듯 보이지만, 독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인식하게 됩니다. 작가는 시력을 되찾은 인물들이 여전히 ‘도덕적 실명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한 재난 소설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허위와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드러내는 철학적 우화입니다. 사라마구는 시각을 상실한 인류를 통해, 오히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묻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결핍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회의 도덕적 병리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전염병이라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인류 문명 전체에 대한 성찰을 하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발표 직후 전 세계 문단에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라마구의 가장 강렬한 문제의식이 담긴 작품으로, 인간성과 사회의 근본을 해체하며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의 차이를 탐구합니다. 그는 전염병이라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실명, 즉 이기심과 무관심을 통렬하게 고발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 없는 인물들’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의사’, ‘의사의 아내’, ‘첫 번째 눈먼 남자’, ‘검은 안경을 쓴 여자’처럼 직업이나 특징으로만 불립니다. 이러한 설정은 인간 개개인이 사회적 정체성을 잃었을 때 얼마나 쉽게 군중 속의 익명으로 전락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라마구는 이름을 지우는 방식으로, 문명사회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또한 그의 문체 역시 독창적입니다. 사라마구는 문장부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문단 구분이 없는 긴 문장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혼돈과 절망의 세계를 그대로 체험하게 만들며, 독자로 하여금 숨 막히는 몰입감을 느끼게 합니다. 동시에 독자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철학적 사유의 흐름에 휩쓸리게 됩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20세기말 문학이 도달한 윤리적 고전으로 평가합니다. 인간의 본성, 사회적 질서, 권력의 폭력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주제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수용소 내부의 폭력적 장면들은 ‘문명화된 사회’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작가는 절망이 아닌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습니다. 의사의 아내가 상징하는 인간애와 연민, 그리고 ‘보는 자의 책임’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마지막 빛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시력을 유지한 유일한 인물로서, 단순히 눈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볼 줄 아는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사라마구는 이를 통해 ‘시각’보다 중요한 것은 ‘통찰’임을 역설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현대 사회의 무관심과 타락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눈이 멀어버린 사회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 소설은 결국 독자 스스로에게 “나는 진정으로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철저히 사유하게 만듭니다.
2008년에는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영화로 각색해 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원작의 철학적 깊이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시각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무기력과 혼돈을 효과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만큼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인류 문명 전체에 대한 성찰의 장으로 읽힙니다.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마라구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입니다. 그는 20세기말 유럽 문학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작가로 평가받으며,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탐구했습니다.
사라마구는 리스본 근교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정규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인쇄소 조수, 기술자, 기자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체험은 훗날 그의 문학 세계에 깊은 현실 인식과 사회 비판적 시선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에 첫 소설을 발표했으나, 한동안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포르투갈의 정치 변화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 권력 구조, 인간의 도덕적 위선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리스본 포위기>, <지상의 복제인간>, <예수의 복음>, <눈먼 자들의 도시>, <도플갱어> 등이 있습니다.
사라마구의 문체는 독특한 리듬과 긴 호흡의 문장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문장부호를 최소화하고, 대화와 서술을 구분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합니다. 이러한 문체는 단순히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언어의 혼란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결과입니다.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언어의 본질을 재발견하는 철학적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8년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그를 “끊임없는 상상력과 도덕적 통찰로, 인간의 불안한 현실을 드러낸 작가”로 평가했습니다. 그는 수상 후 연설에서 “작가는 사회의 거울이 아니라, 그 거울에 비친 어둠을 드러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은 그가 문학을 통해 추구한 윤리적 사명감을 잘 보여줍니다.
사라마구는 정치적으로도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회 정의와 인간의 존엄을 옹호하며, 권력과 종교의 위선을 비판했습니다. <예수의 복음> 발표 당시 가톨릭계의 거센 반발을 받았지만, 그는 신앙의 본질을 되묻는 문학적 용기로 평가받았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도 그는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글을 쓰며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초월한 상징과 비유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인간다움’을 회복하려는 윤리적 열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2010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문학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꿰뚫어 본 작가로,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사유의 정점에 선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의 빛과 어둠을 마주하는 철저한 자기 성찰의 여정을 걷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