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페미니즘과 하드 SF의 절묘한 결합, <체체파리의 비법>

by beato1000 2025. 11. 15.

체체파리의 비법 표지
<체체파리의 비법>

 

 

 

인간 사회의 폭력성이 얼마나 쉽게 발휘되는지 경고하는 소설

 SF라는 장르는 특히 페미니즘과 결합해 훌륭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선구적인 여성 작가들은 SF적 상상력과 현실 속 여성 억압의 문제를 결합해 기념비적인 소설을 창작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체체파리의 비법>은 이러한 페미니즘 SF 소설 중 단연 백미라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도 이 소설을 처음 읽고 놀라운 상상력과 강렬한 메시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충격적인 내용과 달리 다소 귀여운 표지와의 부조화도 눈길을 끌었죠. 

<체체파리의 비법(The Screwfly Solution)>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James Tiptree Jr.)가 발표한 가장 충격적이며 강렬한 단편 중 하나로, 인류의 폭력성과 성적 충동의 기원을 새로운 SF적 관점에서 탐구한 문제작입니다. 이 작품은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이상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 남성에게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극단적 여성혐오적 폭력의 원인을 추적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이야기 전개는 서간문 형식과 사건 보고 형식이 섞여 있어, 독자가 실제 재난 보고서를 읽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합니다.
소설은 남성들이 이유 없이 여성에게 살의를 품고 공격하는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종교적 광신, 정치적 극단주의, 정신 질환의 급증 같은 사회학적 가설들이 제기되지만, 사건의 폭발적 확산 속도는 기존 설명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 앨런은 곤충학자로, ‘체체파리(蠅)’를 이용해 특정 개체군을 멸종시키는 생물학적 방제 기법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그는 여성에 대한 살해 충동이 체체파리 방제 방식과 유사하게 ‘유도된 행동 변화’일 수 있다는 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인간 행동이 단순히 문화적·심리적 요인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신호나 외부 자극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남성들은 성적 충동이 폭력 충동으로 왜곡되어 발현되는 증세를 보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즉, 생식 본능이 파괴적으로 전환되며 여성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앨런은 아내 앤과 떨어져 다른 지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고, 각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종합해 이러한 행동 변화가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유도된 ‘변이 현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구를 계속하던 중 남성으로서 자신 또한 변이의 영향을 피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어가며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독자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제공합니다. 변이 현상의 원인은 인간 내부가 아니라 외부적 기원, 즉 지구 밖 존재의 개입 가능성으로 암시됩니다. 외계 존재가 인간 종족의 절멸을 목표로 하고 있고, 남성의 생식·애정 충동을 폭력으로 치환함으로써 ‘스스로 멸종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인류를 공격하고 있다는 가설이 제시됩니다. 여성들이 사라진 뒤 남성들마저 스스로의 공격성을 통제하지 못해 사라져 가는 모습은, 인류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결국 <체체파리의 비법>은 인간 사회의 폭력성이 단순히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외부 자극에 의해 쉽게 전환될 수 있는 취약한 구조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파국을 생존한 마지막 여성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엔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종말의 무력감’을 극대화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SF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

<체체파리의 비법>은 현대 SF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단편 중 하나로 꼽히며, 특히 ‘인간 폭력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통찰이 대단히 급진적이고 선구적이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됩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소지니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지만, 이를 외계적 개입과 생물학적 본능의 왜곡이라는 설정으로 치환한 점은 문학적·사상적으로 매우 독창적입니다.
문학적 평가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냉정한 보고서적 문체’와 ‘일상적 관계의 파괴’를 결합한 서사 구조입니다. 독자는 처음부터 남성들의 폭력성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것이 단순 범죄가 아니라 종말적 징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작품은 공포를 감정적으로 증폭시키는 대신, 사건을 차분하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더 강한 충격을 주는 구조를 취합니다. 이는 팁트리 특유의 서늘한 문체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체체파리의 비법>은 페미니즘 SF와 하드 SF 사이의 균형을 매우 탁월하게 유지합니다. 폭력의 구조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불안과 공포를 문학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매우 설득력 있게 구현됩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여성의 실존적 공포를 과학적 구조 속에 정확히 투영한 걸작”이라고 평가합니다.
또한 작품 자체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도 중요한 평가 포인트입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외계적 개입 때문이라는 설정은 단순한 SF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폭력과 혐오가 얼마나 쉽게 폭발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독자는 이것이 ‘외계적 신호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 본성의 연장선’인지 흔들리는 가운데 작품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이 작품이 꾸준히 재조명되는 이유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 사회적 혐오, 성적 충동의 왜곡, 증오 범죄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설정 위에서 폭력의 구조를 다루는 이 소설은 현대적 현실을 정확히 예측한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며, 그렇기에 출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문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여성 억압을 심도깊게 다룬 SF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James Tiptree Jr.)는 본명 앨리스 B. 셸던(Alice B. Sheldon, 1915~1987)으로, 필명을 사용해 활동한 미국의 여성 SF 작가입니다. 팁트리는 오랜 기간 동안 남성 작가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의 정체가 공개되기 전까지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강렬하고 공격적인 남성적 문체’를 가진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체가 드러난 후, 그간의 작품들이 여성의 시각에서 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SF 문학계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팁트리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성, 폭력, 정체성, 고립, 생물학적 본능 등 인간 내부의 그늘을 탐색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감정적 장면을 서정적으로 붓칠 하는 대신, 차갑고 분석적인 언어로 인간 심리를 해부하듯 그려내는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체체파리의 비법>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냉정한 관찰자적 문체는 바로 이러한 작가적 성향을 극대화한 사례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군에 복무하며 첩보 분석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이는 그의 작품 속 과학적 사실성, 보고서적 문체, 기술적 디테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인간 내면의 구조를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이 요소는 그의 작품 전반에 깊이 스며 있습니다.
팁트리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남성 필명을 사용했음에도 여성 작가들이 주로 다루던 주제—특히 성적 폭력과 여성 억압—을 매우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여성에 대한 통찰이 비정상적으로 깊은 남성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체 공개 후 비평가들은 팁트리를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이해하는 작가”라고 평가하며, 성별 이분법을 넘어선 문학적 시각을 인정했습니다.
팁트리는 휴고상, 네뷸러상을 비롯한 주요 SF 문학상을 다수 수상했으며, 그의 단편들은 현대 SF 문학의 정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파고들면서도, 사회 비판과 문학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예외적인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체체파리의 비법>은 그의 사상과 문체, 세계관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 대표작입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체체파리의 비법>은 인간 폭력의 본질을 생물학적·우주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충격적인 SF 걸작입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어떻게 사회적 문제를 넘어 종말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강렬한 서사로 보여주며, 독자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기술적 설정과 심리적 묘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은 현대적 의미까지 겹쳐져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