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SF 소설, <나인폭스 갬빗>

by beato1000 2025. 11. 9.

나인폭스 갬빗 표지
<나인폭스 갬빗>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후보에 오른 소설

이윤하(Yoon Ha Lee)의 <나인폭스 갬빗(Ninefox Gambit)>은 수학적 세계관과 군사 전략, 그리고 복잡한 윤리적 질문이 결합된 독창적인 SF 소설입니다. 2016년 출간된 이 작품은 ‘머시너리스(Machineries of Empire)’ 3부작의 첫 번째 권으로, 우주 제국의 체제 속에서 질서와 혼돈, 인간성과 시스템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이윤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서, 과학적 사고와 동양 철학, 군사적 미학을 융합한 독특한 문체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나인폭스 갬빗>은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후보에 오르며 현대 SF의 새로운 경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SF 장르는 미국을 비롯해 유럽 작가를 중심으로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종이 동물원>을 쓴 켄 리우나 <나인폭스 갬빗>의 이윤하처럼 아시아 출신 작가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기반으로 한 훌륭한 SF 소설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들은 SF 장르에 더 다양한 이야기와 세계관을 공급해 줍니다. SF 장르가 가지고 있는 큰 매력 중 하나이지요. 

 


한국의 신화와 역사를 담은 우주 대서사시

<나인폭스 갬빗>의 배경은 ‘헥사아크(Heptarchate)’라는 제국적 체제의 우주입니다. 이 사회는 수학적 ‘달력(Calendar)’ 시스템을 기반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모든 과학과 무기, 종교, 심지어 사회적 규범까지 달력의 규칙에 의해 통제됩니다. 이 세계에서 수학은 곧 현실을 조작하는 힘이며, 달력의 불일치는 곧 우주의 법칙이 흔들리는 혼돈을 의미합니다.
주인공 켈 체리스(Kel Cheris)는 천재적인 전술가이자, 제국 군대의 장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투 중 ‘비정통적 전술’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는 ‘포트레스 오브 스캐터드 닛(Fortress of Scattered Needles)’이라는 반란 행성을 진압하는 위험한 임무입니다. 이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저항이 아니라, ‘달력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사상적 반역이기도 합니다.
제국은 체리스에게 불가능한 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반역자 ‘제드아오 자르(Jedao)’의 정신을 소환해 함께 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자르는 수백 년 전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천재 전술가이지만, 결국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를 포함해 백만 명을 학살한 미치광이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제국은 그의 ‘전략적 광기’를 다시 활용하기 위해 체리스의 몸에 그의 정신을 융합시킵니다.
체리스는 자르의 유령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합니다. 그녀는 그와 대화하며 점차 자르가 단순한 광인이 아니라, 제국 체제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려 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지휘관과 조언자의 관계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의심하고, 이해하며, 때로는 하나로 융합되는 긴장된 심리적 결합으로 발전합니다.
이 소설의 중심은 ‘전쟁’이지만, 그 속에는 수학적 사고와 철학적 질문이 녹아 있습니다. 전투는 단순한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달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계산적 행위이며, 무기조차 수학적 공식에 의해 발사됩니다. 전장은 현실이 아니라 논리와 신념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결국 체리스는 자르의 기억을 통해 제국의 숨겨진 진실을 깨닫습니다. 질서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제국은 사실상 ‘달력’이라는 허구적 신앙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적 시스템이었습니다. 체리스는 제국의 정의와 자신이 싸워온 목적을 다시 묻게 되며, 그 질문 속에서 인간성과 시스템의 본질적 대립이 드러납니다. <나인폭스 갬빗>은 수학과 군사 전략, 신앙과 윤리, 인간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거대한 지적 우주를 펼쳐 보입니다.

 

혁신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SF 작품

<나인폭스 갬빗>은 현대 SF문학에서 가장 혁신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윤하는 물리학적 사실과 수학적 구조를 결합해, ‘논리로 구성된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독자에게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새로운 사고 체계를 체험하게 합니다.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수학적 마법’이라 불리는 세계 설정입니다. 이윤하는 SF적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마법적 세계관처럼 재구성했습니다. 그는 수학적 정합성이 곧 물리적 현실을 결정하는 사회를 묘사하며, 과학과 신앙, 합리성과 광기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이 설정은 독자에게 지적 도전이 되지만, 동시에 그 복잡함 속에서 놀라운 미학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비평가들은 <나인폭스 갬빗>을 ‘하드 SF와 밀리터리 SF, 그리고 철학적 스페이스 오페라의 융합체’로 평가합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서구 SF에서 보기 드문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이윤하는 단순히 기술 중심의 서사를 쓰지 않고, 체제의 이념, 기억의 윤리, 정체성의 혼란 같은 인간적 주제를 전면에 배치했습니다.
특히 켈 체리스와 제드아오 자르의 관계는 이 작품의 핵심 축입니다. 두 인물은 육체와 정신, 현재와 과거, 복종과 자유라는 대립을 상징합니다. 체리스는 체제에 충성하는 전사이지만, 자르의 존재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철학적 논쟁처럼 진행되며, 인간이 체제 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문체적으로도 이윤하의 서술은 정교하고 시적입니다. 그는 전투 장면조차 수학적 리듬과 비유로 묘사하며, 폭력의 미학을 지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예컨대 “달력의 위상이 무너졌다”는 표현은 단순한 혼란의 묘사가 아니라, 세계의 법칙 자체가 붕괴하는 우주적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또한 <나인폭스 갬빗>은 동양적 세계관과 서구적 과학을 절묘하게 융합합니다. 이윤하는 한국계 작가로서, 질서와 조화, 군사적 의례의 상징을 동양적 철학에서 차용했습니다. 제국의 달력 체제는 유교적 위계질서와 종교적 집단주의의 메타포로 읽히기도 합니다.
비평적으로는 ‘난해하다’는 평가도 존재하지만, 그 복잡함이 곧 작품의 정체성이자 미학입니다. 이윤하는 독자에게 익숙한 SF 공식 대신, 완전히 새로운 언어적 구조를 제시합니다. 이로써 그는 ‘읽는 경험’ 자체를 사유의 과정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나인폭스 갬빗>은 단순한 전쟁 SF가 아니라,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해체하는 철학적 소설입니다. 인간이 만든 질서가 언제부터 신앙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신앙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다문화적 정체성을 SF에 녹여낸 작가, 이윤하

이윤하(Yoon Ha Lee, 1979~ )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현대 SF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고, 뉴욕과 캘리포니아 등 여러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에 흥미를 보였으며, 이러한 관심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이 반영되었습니다.
이윤하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이후 수학 교육학 석사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학문적 배경을 소설적 세계관 구축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이를 통해 ‘수학적 구조를 서사의 언어로 바꾸는 작가’로 불립니다. 그의 작품은 숫자, 규칙, 패턴이 인간 사회의 은유로 작동하는 독창적 미학을 보여줍니다.
이윤하의 문학적 경력은 단편소설로 시작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부터 『클락스월드(Clarkesworld)』, 『애널로그(Analog)』 등 유명 SF 잡지에 단편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장편 데뷔작인 <나인폭스 갬빗>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윤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논리의 폭력’을 탐구합니다. 그의 세계에서는 질서와 규칙이 단순한 사회적 구조가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신앙 체계로 작용합니다. 그는 수학과 언어, 군사적 명령이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지를 분석하며, SF를 철학적 사유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또한 그는 한국계 작가로서 다문화적 정체성을 작품에 반영합니다. 그의 소설에는 동양적 미학, 집단적 윤리, 의례의 상징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서구 SF의 기술 중심주의와 달리, 인간 중심적이고 철학적인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나인폭스 갬빗>을 비롯한 ‘머시너리스 3부작’—<래이븐 스트래티지(Raven Stratagem)>, <레베이션 게임(Revelation Space)>—이 있으며, 이 시리즈는 비평계로부터 ‘21세기 SF의 새로운 기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청소년을 위한 판타지 시리즈 <드래곤펄(Dragon Pearl)>은 뉴베리 상 후보에 오르며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인정받았습니다.
이윤하는 인터뷰에서 “나는 수학과 언어, 전쟁과 기억의 관계에 매혹된다. 규칙을 만드는 행위는 곧 신의 역할을 흉내 내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그가 단순한 스토리텔러가 아니라, 체제와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철학적 작가임을 보여줍니다.
현재 그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며, 창작과 수학 교육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통해, SF가 인간의 철학을 담아내는 문학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인폭스 갬빗>은 전쟁의 서사를 수학과 철학으로 재구성한 지적 걸작입니다. 이윤하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만든 질서의 허구를 드러내고, 체제와 신앙, 자유와 복종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 ‘질서가 신이 된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가를 묻는 철학적 서사입니다. <나인폭스 갬빗>은 현대 SF문학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빛나는 예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