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홍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중국판 하드보일드 소설, <13.67>

by beato1000 2025. 10. 24.

13.67 표지
<13.67>

 

 

 

홍콩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을 탐구한 사회파 추리소설 걸작

찬호께이(陳浩基)의 <13.67>은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을 넘어, 홍콩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을 탐구한 사회파 추리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2014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된 장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야기의 시간은 2013년에서 1967년으로 거꾸로 흐릅니다. 제목의 숫자 13.67은 바로 그 시간의 역행을 상징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전설적인 형사 권쭈키(關祖基)입니다. 그는 ‘홍콩 경찰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형사’로 불리며, 그가 담당한 여섯 개의 사건이 작품을 이끕니다. 흥미로운 점은 첫 번째 사건이 가장 최근의 것이고, 이후로 갈수록 과거로 돌아가면서 그의 인생과 홍콩의 변화가 함께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흑과 백의 진실〉에서는 2013년 은퇴를 앞둔 권쭈키가 과거의 동료이자 현재의 적이 된 경찰 간부와 마지막 대결을 벌입니다. 정치적 음모와 부패가 얽힌 사건 속에서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명예마저 걸게 됩니다. 이때부터 작가는 ‘정의란 무엇인가’, ‘법과 권력 중 무엇이 옳은가’라는 도덕적 질문을 던집니다.
두 번째 이야기 〈레몬사건〉, 세 번째 〈심야 버스〉에서는 홍콩 사회의 뒷면이 드러납니다. 범죄의 논리, 경찰 내부의 부패, 시민들의 절망과 생존 본능이 복합적으로 엮이며, 한 개인이 거대한 도시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이후 작품은 1980~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홍콩의 급속한 산업화와 식민지 시대의 긴장 속에서 형사 권쭈키의 젊은 시절을 그립니다. 그는 처음엔 이상에 불타는 신입 경찰이었으나, 사회의 불의와 제도의 모순을 마주하며 점차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변합니다. 작가는 그의 변화를 통해 정의와 타협의 경계,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체제 속에서 자신을 잃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이자 제목의 기원이 되는 〈13.67〉은 1967년 홍콩 폭동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에서 독자는 젊은 권쭈키가 처음으로 형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를 목격하게 됩니다. 사회 혼란, 정치적 이념 갈등, 인종적 긴장 속에서 그는 ‘진실을 보는 눈’을 얻지만, 동시에 ‘진실이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깨닫습니다.
결국 <13.67>은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 인간의 삶과 한 도시의 역사를 포개어 보여주는 서사적 실험입니다. 단편처럼 읽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완벽한 구조를 이루며, 시간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듯한 정교함이 돋보입니다. 작품은 홍콩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를 깊이 있게 탐색합니다.

 


아시아적 리얼리즘과 영국식 추리문학이 완벽하게 융합된 작품

<13.67>은 출간 직후 홍콩뿐 아니라 대만, 중국, 일본 등 중화권 전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역순 서사’라는 독창적인 구조와, 추리소설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녹여낸 점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아시아적 리얼리즘과 영국식 추리문학의 완벽한 융합”이라 평했습니다. 사건의 퍼즐을 맞추는 재미는 물론, 그 뒤에 숨은 인간의 욕망, 부패, 기억의 왜곡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찬호께이는 추리소설의 외피를 빌려 ‘진실은 언제나 권력과 시간 속에서 변질된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독자들이 주목한 것은 이야기의 역행적 구조입니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과거의 사건을 파헤치며 현재로 나아가는 반면, <13.67>은 현재에서 과거로 거꾸로 내려갑니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가 사건의 진상을 점점 더 멀리서 바라보게 만들고, 결국 “모든 진실은 이미 과거에 묻혀 있었다”는 깊은 허무감을 남깁니다.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 또한 탁월합니다. 각 에피소드는 완벽하게 독립적인 사건처럼 읽히지만, 모든 조각이 모이면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부하는 추리문학의 혁신이라 할 만합니다.
또한 <13.67>은 홍콩이라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인물처럼 다룹니다. 식민지 시대의 억압, 급격한 경제 성장, 반환 이후의 혼란과 불안—all of these—가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범죄의 배경은 곧 사회의 초상이며, 각 시대의 사건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을 반영합니다. 찬호께이는 범죄를 통해 도시의 기억을 기록하고, 그 안에서 사라져 가는 정의의 형상을 포착합니다.
문체 또한 탁월합니다. 그는 복잡한 플롯 속에서도 리듬감 있는 문장과 세밀한 묘사로 독자를 끌어당깁니다. 특히 경찰과 범죄자의 심리를 교차하는 장면들은 마치 영화의 컷처럼 날카롭고 긴장감이 넘칩니다.
일본 평론가들은 <13.67>을 “홍콩의 용의자 X의 헌신”이라 평가했고, 대만에서는 “홍콩 추리문학의 르네상스를 연 작품”이라 칭했습니다. 이후 찬호께이는 이 작품으로 섬나라문학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무엇보다 <13.67>의 진가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있습니다. 정의는 시대에 따라, 권력에 따라, 혹은 개인의 기억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작가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은 때로 인간의 양심보다 더 잔혹하다.”

 

 

아시아 미스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찬호께이

찬호께이(陳浩基, Chan Ho-Kei, 1975~ )는 홍콩 출신의 추리소설가로, 동시대 아시아 미스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홍콩대학 전산학과를 졸업한 뒤 IT 업계에서 일하다가, 2008년 단편 <가면>으로 제4회 ‘시티 유니버시티 미스터리 단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그는 논리적 구조와 사회적 문제의식을 결합한 독창적인 서사로 주목받았습니다. 2011년에는 장편 <기억의 밤>으로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아시아 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2014년 발표한 <13.67>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찬호께이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복잡한 역사와 사회 구조를 깊이 있게 다루는 작가입니다. 그는 단순히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죄를 통해 인간의 윤리, 권력의 작동, 기억의 왜곡을 탐구합니다. 특히 <13.67>에서 그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서술함으로써, 진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홍콩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절부터 반환 이후까지 이어진 정치적 불안, 계층 간의 격차, 정체성의 혼란 등은 찬호께이 소설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는 “홍콩은 거대한 퍼즐 같다. 나는 그 조각을 맞추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문체 면에서 그는 이과적 사고를 바탕으로 정교한 플롯과 논리 전개를 선보입니다. 동시에 인물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그리며, 냉정함 속의 인간미를 잃지 않습니다. 이러한 균형감 덕분에 그의 소설은 추리소설 팬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찬호께이는 <13.67> 이후에도 <천국보다 낯선>, <원혼의 도시> 등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홍콩 사회의 이면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찬호께이의 글은 언제나 인간의 도덕적 회색지대를 응시하며, 그 속에서 진실의 의미를 되묻습니다.
찬호께이는 인터뷰에서 “나는 탐정이 아니라 기록자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기억을 잊히지 않게 기록하는 것이 내 소명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지만, 그 속에는 한 시대를 증언하려는 문학적 의식이 흐르고 있습니다.
찬호께이는 지금도 홍콩과 대만을 오가며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꾸준히 독자층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홍콩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작가로, 아시아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