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폐한 화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포스러운 탐험 이야기
어릴 때 우연히 읽었는데 푹 빠져드는 소설이나 이야기에 대한 경험을 다들 가지고 계시겠지요? 저도 그런 작품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해드리는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초등학생 때 산 청소년 잡지의 별책 부록에서 읽었습니다. 당시 여름이라 그런지 공포문학을 묶은 작은 별책 부록을 줬었는데, 그 작품들이 모두 너무 재미있고 기괴해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어릴 때 읽은 책이라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라는 작가의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별책 부록에 실린 단편 작품들은 모두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책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아쉽게도 국내에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작품이 번역된 책이 없었는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이 정식으로 번역되면서 같이 활동했던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작품집까지 함께 나왔습니다. 작품집에 실린 중단편 중 어릴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중편을 오늘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 (The Vaults of Yoh-Vombis)>는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Clark Ashton Smith)가 1932년에 발표한 고전 SF 호러 소설로, 황폐한 화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포스러운 탐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H.P. 러브크래프트와 로버트 E. 하워드와 함께 20세기 초 미국 환상 문학계를 대표했던 스미스 특유의 화려하고 음울한 문체, 외계의 기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그리고 존재론적 공포감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에머리 박사로, 그는 동료 고고학자들과 함께 화성 고원 지대에서 고대 도시 유적을 조사하던 중, 사막 한복판에서 <요-봄비스>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 도시의 폐허를 발견합니다. 이 유적은 오랜 시간 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었으며, 외부 문명과의 접촉을 끊은 채 완전히 잊힌 장소였습니다. 탐사대는 이 도시를 발굴하며 내부 구조물을 하나씩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낡은 유적처럼 보였던 이곳은 곧 점점 더 기이한 흔적을 드러냅니다. 특히 지하로 이어지는 깊고 어두운 통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거대한 납골당은 탐사대 전원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에머리 박사는 동료들과 함께 지하에 들어가 조사하기로 결정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와 마주하게 됩니다. 납골당에는 죽은 자들이 단순히 안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살아 있는 듯한 기괴한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그 흔적은 고대 화성 생명체의 잔재이자, 현재에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위협이었습니다.
탐사 도중, 팀원들은 정체불명의 생물체에게 차례로 공격당합니다. 이 생물체는 일종의 반기생충적 존재로, 숙주의 뇌를 통제하고 육체를 조종하며, 살아 있는 듯한 시체를 만들어냅니다. 이 장면은 공포 영화나 좀비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생/조종’ 개념의 원형적 모티브로 작용하며, 이후 다양한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에머리 박사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는 이 경험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입고 만성적인 불안과 환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탐험기라기보다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생명체와 문명에 직면했을 때, 과학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고대 화성 문명의 잔해를 조사하던 이들이 결국 그 문명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과정은 인간 중심주의의 허상을 무너뜨리고, 외계 문명에 대한 경외와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스미스는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을 통해, 고대의 신화적 공포와 과학적 탐사의 경계를 흐리며, 독자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적 공포를 전달합니다. 이야기는 짧지만 매우 밀도 있고 강렬하며, 읽는 내내 무거운 분위기와 장면의 생생함이 독자를 몰입시킵니다.
러브크래프트풍 코스믹 호러 문학의 대표작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대표적인 SF 호러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그가 이룬 미학적 성취와 상상력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러브크래프트풍 코스믹 호러 문학의 뛰어난 예로 자주 언급됩니다. 특히 고대 문명의 잔재를 중심으로 한 고고학적 탐사, 이성과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 인간 정신의 붕괴 등은 러브크래프트 서클의 주요 테마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장르적 융합의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외형적으로는 SF에 속하지만, 그 핵심은 오히려 고딕적이고 신화적인 공포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과학 탐사의 장소인 화성이지만, 작중 분위기와 사건의 전개는 고대 신전의 저주나 지하 묘지에서 깨어나는 공포를 다룬 호러물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가 가진 문학적 특성이며, 독자에게는 현실과 판타지, 과학과 신화를 동시에 감각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스미스의 문체 역시 이 작품의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언어를 즐겨 사용하며, 극단적으로 화려하거나 고풍스러운 단어 선택을 통해 장면을 더 기이하고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납골당의 묘사, 생명체의 형태, 고대 도시의 황폐함 등은 단순한 시각적 묘사를 넘어선 문학적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글을 읽는 동시에 마치 고대의 기록이나 악몽 속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이 이후 다양한 SF 호러 창작물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의 생명체 구조나 우주선 내부의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포, 또는 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 같은 작품에서도 유사한 긴장 구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계보는 스미스의 상상력이 단지 1930년대 잡지 소설의 범위를 넘어, 현대 공포와 SF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소설은 인간의 오만함과 무지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 합리적 사고로 모든 미지의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은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줍니다. 탐사대는 고대 도시의 문을 열었지만,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귀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상상조차 초월하는 고대 생명체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생명체와의 조우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파멸합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한 공포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은 짧은 분량 속에 밀도 높은 공포, 뛰어난 세계관,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문체가 결합된 수작입니다. 고전 호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다소 도전적일 수 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다 보면, 이 작품이 가진 미학적 깊이와 장르적 실험정신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는 이 소설을 통해 단순한 공포의 전달을 넘어, 문학적 체험을 선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20세기 초의 '위어드 픽션'을 대표하는 작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Clark Ashton Smith, 1893–1961)는 미국의 시인, 화가, 조각가, 그리고 환상 문학 작가로, 20세기 초 대표적인 '위어드 픽션(Weird Fiction)'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는 H.P. 러브크래프트, 로버트 E. 하워드와 함께 ‘러브크래프트 서클’을 구성하며,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입니다. 스미스는 장르 문학의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시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를 익히고, 고전 문학과 철학, 신화에 정통한 지식을 바탕으로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첫 시집을 출간할 정도로 천재적인 문학적 자질을 보였으며, 초기에는 시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점차 장르 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단편 소설 집필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네 가지 상상 세계—하이페르보리아(Hyperborea), 아틀란티스의 대륙인 뮈(Mu), 조티케(Zothique), 아버로니오(Avallonio)—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 각각의 세계는 고대 신화와 퇴폐적 상상력, 종말론적 분위기로 가득 찬 공간이며, 그 안에서 인간의 탐욕, 무지, 오만이 어떻게 자멸로 이어지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은 그의 비교적 과학적 배경을 도입한 드문 작품이지만, 여전히 신화적 공포와 고딕적 이미지가 중심을 이룹니다.
스미스는 러브크래프트와의 편지 교류를 통해 상호 문학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그의 작품에도 코스믹 호러 요소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의 우울하고 냉정한 우주관과 달리, 스미스는 보다 시적이고 감각적인 문체로 공포를 형상화하며, 인간 내면의 욕망과 공허를 섬세하게 탐색했습니다.
그는 생애 동안 100편 이상의 단편 소설과 수백 편의 시를 남겼으며, 조각과 회화에도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사후에는 그의 작품이 다시 조명되면서, 현대 다크 판타지와 호러의 원류로 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현대 작가들이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는 경우가 많아, 그는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기도 합니다.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는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언어와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고전의 무게와 현대적 공포, 그리고 시적 감성이 결합된 독특한 미학을 지니고 있으며, <요-봄비스의 지하 납골당>은 그가 남긴 문학 유산 중에서도 특히 빛나는 수작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