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과 젠더, 정치 문화의 상대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소설
통상 SF와 같은 장르 문학에는 '문학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망언이지만, 통상 이런 망언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권해주는 SF 작가가 몇 명 있습니다. <시녀 이야기>를 쓴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나 <킨>의 옥타비아 버틀러,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어슐러 르 귄입니다. (뛰어난 문학성을 갖춘 SF 작가는 이 세 작가 외에도 많습니다.) 어슐러 르 귄의 여러 작품 중 대표작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어둠의 왼손>입니다.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은 미국 작가 어슐러 르 귄(Ursula K. Le Guin)이 1969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로, 현대 SF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외계 행성 탐사 이야기를 넘어서, 성(性)과 젠더, 정치, 문화의 상대성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담고 있으며, 르 귄 특유의 인류학적 시선과 서정적 문체가 어우러진 철학적 SF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게덴’이라 불리는 얼음 행성입니다. 이곳은 혹독한 기후와 긴 겨울,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도 독특한 문화와 생물학적 특징을 가진 인류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행성의 가장 큰 특징은 주민들이 기본적으로 무성(無性)의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양성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일정한 주기에 ‘케머’ 상태에 들어가면 남성 혹은 여성으로 변합니다. 이로 인해 게덴 사회는 우리가 아는 젠더 기반 사회 구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낯선 세계에 ‘에큐멘(Ekumen)’이라는 은하 연합체에서 파견된 외계 사절, 제나이 아이(Genly Ai)가 도착합니다. 그는 게덴을 에큐멘에 가입시키기 위한 외교 사절로, 행성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문화적, 정치적 장벽을 넘어서려 합니다. 하지만 제나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논리가 게덴의 복잡한 정치 구조와 인식 체계 안에서는 쉽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게덴에는 두 개의 주요 국가, 카르하이드와 오르골레인이라는 정치 세력이 있으며, 두 국가는 미묘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제나는 먼저 카르하이드의 왕 아르가반과 접촉하지만, 곧 배신당하고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그를 도운 유일한 존재는 에스트라벤이라는 인물입니다. 에스트라벤은 카르하이드의 전직 재상으로, 제나를 신뢰하며 그를 돕지만, 제나는 처음에는 에스트라벤의 젠더적 중립성에 불신과 혼란을 느낍니다.
이후 제나와 에스트라벤은 혹독한 겨울을 맞으며 빙판 지대를 함께 횡단하게 됩니다. 이 여정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는 핵심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인간관계, 문화적 차이, 언어적 오해, 젠더에 대한 편견 등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서로에 대한 깊은 우정과 공감이 자라납니다. 결국 제나는 자신이 가졌던 ‘이분법적 세계관’—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진보와 후진 등의 구분이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둠의 왼손>은 외계 세계를 다루면서도, 그 중심에는 ‘인간성’이라는 본질적 질문을 놓치지 않습니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언어와 성의 차이가 우리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성찰하게 하며,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독자를 깊은 감정과 사유 속으로 이끕니다.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 수상한 현대 문학의 고전
<어둠의 왼손>은 출간 당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휴고상과 네뷸러상 등 SF 문학의 양대 상을 모두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SF 장르 안에서도 ‘사회적 SF’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성과 젠더, 문화상대주의, 타자 이해 등의 주제를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풀어낸 보기 드문 예로 평가됩니다. 당시만 해도 과학적 상상력이나 기술 묘사에 집중된 하드 SF가 주류였던 상황에서, 르 귄은 이 작품을 통해 SF가 인간과 사회, 윤리와 철학을 담을 수 있는 장르임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어둠의 왼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젠더에 대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게덴 행성의 주민들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주기적으로 성이 전환되는 존재들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사회는 우리가 익숙한 ‘젠더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성적 역할, 권력 구조, 사회적 기대 등에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르 귄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성 역할과 사회 규범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인지를 조명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페미니즘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르 귄 자신은 후에 이 작품에서의 젠더 표현이 여전히 이분법적 언어를 사용한 점에 대해 비판을 수용하고, 젠더 표현의 다양성을 더 정교하게 다루는 후속 작품들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왼손>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작품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젠더, 정체성, 타자성에 대한 논의에 있어 여전히 유효한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문체와 서사 방식 역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르 귄은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나이 아이의 보고서와 설화, 민담, 전통적인 종교 신화 등의 형식을 교차 사용하면서 게덴이라는 행성의 문화를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독자에게 한 외계 문명을 마치 인류학자가 탐구하듯 체험하게 만들며, 이야기에 현실감을 더합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인간적 유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나와 에스트라벤이 빙설의 대지를 함께 건너는 여정은 단순한 생존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진심이 쌓여가는 감정의 드라마입니다. 이 여정을 통해 독자는 ‘타자’는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나의 고정관념 속에 숨어 있는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어둠의 왼손>은 SF라는 장르적 외피를 입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공감’의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독자에게 삶과 사고방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SF를 넘어서 현대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어슐러 르 귄 작가 소개
어슐러 르 귄(Ursula K. Le Guin, 1929~2018)은 미국의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로, 20세기 후반 SF 및 판타지 문학의 지형을 바꾼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장르 작가를 넘어서, 인류학과 철학, 정치학, 생태학 등 다양한 사유를 문학적으로 구현해 낸 지성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독창적인 세계관과 깊은 사상적 기반, 그리고 서정적인 문체를 통해 수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르 귄은 인류학자인 아버지 앨프레드 크로버와 작가인 어머니 시어도라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와 신화를 접하며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다른 문명’과 ‘타자 이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SF나 판타지를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과 사고 체계를 실험하는 철학적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어둠의 왼손>,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 <항해하는 자들의 행성>, <어스시의 마법사(A Wizard of Earthsea)> 시리즈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르 귄 특유의 세계관과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보여줍니다. <어스시> 시리즈는 판타지 장르에서 성장과 자아 탐색을 중심 주제로 삼았고,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은 성, 정치, 윤리 같은 주제를 SF적으로 풀어낸 걸작입니다.
그녀는 SF와 판타지의 ‘문학적 가능성’을 끌어올린 작가로 인정받으며,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주요 문학상을 다수 수상했습니다. 또한 미국 SF 판타지 작가협회에서 수여하는 ‘그랜드 마스터’ 칭호를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르 귄은 여성과 소수자, 생태 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일관되게 작품 속에 담아냈으며, 젠더와 권력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통해 문학적 실험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문학을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으며,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라"고 말했습니다.
201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전 세계 문학계는 한 시대가 끝났다고 말할 만큼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으며, 그녀가 남긴 문학적 유산은 앞으로도 수많은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어슐러 르 귄은 상상력의 힘이 얼마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작가이며, 그 정신은 <어둠의 왼손>과 같은 작품을 통해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